디렉터스 코멘터리: ( )로부터-백은선론¹

2025-01-01

이제 상영관으로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부터 아픔을 이야기하는 일이 너무나 새삼스럽고도 뻔하게 느껴진다.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 무슨 이유로 아픈 건지는 각자의 사정으로 남겨두더라도 모두가 병들어있다는 사실만은 같다. 모두에게나 조금씩 있는 것은 곧 아무에게도 없다는 듯 무마되어버리고야 말기에 개개의 아픔은 충분히 감응되지 못한 채 그곳에 방치된다. 이때 방치되는 것은 또한 스스로의 병든 마음이기도 하다. 도처에 널려있는 아픔, 그 어디쯤 놓인 나 자신의 병증이란 어찌나 작고도 대수롭지 않게만 여겨지는지. 몹시도 오래 아파온 사람은 슬픈 사람이 된다. 그렇게 제때 진단되지 못한 아픔은 이내 슬픔이 된다. 자신이 슬픔인 줄도 모르는 슬픔이 그곳에, 또한 이곳에 있다.

“모두가 잊은 장면들로 만들어진”(‘조롱’), 다시 말해 나조차도 잊어버린 장면들로 만들어진 백은선의 시는 그러므로 오롯한 슬픔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해보아도 될까. 그의 시를 내달리는, 절망이 만들어낸 자학과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더 깊은 절망의 가장 내밀한 곳에 자리하는 것이 때를 놓쳐버린 아픔이라면,² 백은선 시의 화자는 더 이상 낯선 존재일 수 없다. 지나치는 줄도 모르고 지나쳐버린 무수한 증상들 그 속에 그의 화자가 놓여있다. 비록 충분히 발화되지 못했을지언정 아픔은 그곳에, 또한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백은선 시의 화자는 특정 이미지들을 반복하며 일종의 근원지를 향하여 간다. 이 강박적인 몽타주는 과연 무엇의 징후일까.

이것은 끝없이 상영되는 어느 필름에 관한 글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 또한 이곳에 방치해두었던 숱한 마음들과의 뒤늦은 눈맞춤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불)가능세계의 아이러니

무한히 리셋되는 루프 속에 갇힌 것처럼 백은선 시의 화자는 자꾸만 같은 장면에 놓인 채 목격된다. 시작점과 종점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태어나는 동시에 죽어버리고 소멸하는 동시에 도래하는 아이러니는 이 필름의 불문율인 듯하다. 어떠한 미완의 병증을 계기로 영사기가 작동되었다면, 백은선 시의 화자가 세계의 시작과 끝을 움켜쥐고 이토록 집요하게 구는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작이라는 말, 끝 혹은 끝장이라는 말은 백은선의 시에서 유독 자주 발견되는 시어들이지만, 정작 그 어떤 시작도 끝도 명확히 가리키지 않은 채 한데 엉킨다.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동시에 태어난다. 딱딱한 혀 딱딱한 얼음 딱딱한 세계./그러면 도래하는 영원. 그러면 증발하는 영원.// 나는 지금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가, 노트를 펼쳐 단지 지금이라고 적어본다. 지금 옆에 지금, 지금…… 지금이라고. 그러면 눈 내리는 언덕, 지금은 멀고 아득하고 차가운 사람.//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중략)// 첫 행이 씌어지는 순간 마지막 행도 함께 씌어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언덕 너머로 한 사람이 걸어간다. 그는 파랗게 빛난다. 흐릿한 윤곽, 흐릿한 양팔, 흐릿하게 이어지는 검은 발자국.// 지금의 호수, 지금의 나무, 지금의 말할 수 없는 파란 빛.// 그러면 사라지는 한 사람.

- ‘파충’ 부분

지금에 대해 오래 생각하던 ‘나’가 노트를 펼쳐 지금이라고 적었을 때,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하얀 언덕”을 마주한다. 언덕 위에는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눈 한 송이, 눈 두 송이, 눈 억만 송이”를 맞고 선 화자에게는 “창각창각사항사항주국주국/ 눈 내리는/ 소리”(‘여의도’)마저 들리는 듯하다. 침습하듯 내리는 눈은 백은선 시에서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 중 하나이다. 마치 누군가 그를 그 장면 속으로 내던진 듯이 화자는 일상을 살다가도 어느새 다시 설경에 서 있다. 눈송이가 허공을 움켜쥐는 파열음마저도 거슬릴 만큼 예민해진 감각과 휘몰아치는 눈발은 현실보다는 차라리 비현실의 것에 가까운 듯 보인다. “언덕 위로, 어깨 위로, 차갑고 하얀 눈 위로, 다시” 끝없이 되풀이되는 흰빛이 현실로부터 이탈한 어느 장면이라면, 백은선 시의 화자는 왜 자꾸만 “지금”이 아닌 “하얀 언덕”을, 하얗고 파란 비현실의 복판을 영영 헤맬 수밖에 없는 걸까.

만성적인 슬픔은 차마 슬픔이라고 인지되지도 못한 채 소유되지 못한 감정으로 남고야 만다.³ 그러나 쌓였던 눈이 흘러내려 질척거리듯, 그때의 감정 역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의 방식으로 뒤따르며 지금의 나를 “자꾸만 실족”(‘어려운 일들’)시킨다. “어떤 일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파격으로 일어나며 존재에게 끝없이 영향을 미친다.”(‘고백놀이’)

시작하지 못해 완결된 적 없는 과거의 장면은 현실을 침범하고,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기에 ‘나’는 지금을 시작하지 못한다. 백은선 시의 화자는 영원히 “도래하는 영원”의 장면을 걷지만, 영원은 이내 증발해버린다. 영원이 무한한 미래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과거에 붙박인 사람에게 영원이란 그저 “배경도 정황도 없이 흘러가는 영화”(‘비신비’)와 같기 때문이다. 자꾸만 그곳으로 이끌려가는 ‘나’는 “지금의 호수, 지금의 나무”, 이들이 지닌 파란 빛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곳의 ‘나’는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한 사람”이, 사라진다.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천체의 운행 손을 잡아도 기분이 없는 밤 밤을 떠올리는 빈 나무 의자 의자가 되기 전 나무가 가졌을 그림 바지 자비 자비라는 오타 이야기할 입과 듣지 않을 귀 남겨진 손 다시 남겨진 천체의 어마어마 그냥 다 끝장났으면 그랬으면// (중략)// 거스르는 것이 회귀인지 도주인지 봄의 식물이 싹을 내미는 공포인지 하고 싶다 하고 또 하고 하다가 분류하거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구들장인 어깨와 효과 없는 반복으로 가득 차고 싶다.

- ‘가능세계’ 부분

지긋지긋한 되풀이 속에서 화자가 입버릇처럼 “끝장”을 이야기하며 세계의 종말을 기원하는 모습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그는 “이게 끝이면”, 다 “끝장났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며 곧 사라질 것들에게 작별을 고하듯 세계의 면면을 파노라마처럼 훑는다. 어쩌면 방치되어버린 장면의 근원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보편과 티끌, 이미 벌어진 일과 그 이전에 존재했을 가능성, 해야 할 말과 어쩔 수 없는 것들 사이를 횡단하던 화자는 그 끝에서 “천체의 어마어마”를 맞닥뜨린다. 거대하고도 촘촘한 세계의 물리법칙을 상대로 개인에게 닥친 불행의 책임을 묻기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별다른 수가 없기에, “그냥 다 끝장”나기를,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얼핏 저주와도 같이 발화되는 끝장은 사실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입버릇에 불과하다. ‘끝장’이라는 단어로부터 연상되는 파괴력에 비해 “끝장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화자는 너무나 무력하며, ‘~싶다’라는 바람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백은선의 시가 까다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 두서없이 발산하는 이미지들과 긴 분량에 기인한 감상일 테다. 그러나 이렇듯, 곤란할 정도로 과잉하는 이미지와 감정에 비해 화자가 취하고 있는 포즈는 굉장히 소극적이며 회피적이게까지 느껴진다. 스스로 끝장낼 자신이 없이 무수한 가능태에 기대어 끝장을 바라기 ‘만’ 하는 삶은 얼마나 비겁한가.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 화자의 상상 속, “이미 실패했”으며 “다시 실패”할 것이 뻔한 “효과 없는 반복”은 “회귀인지 도주인지” 모를 가능성들이 실은 전부 허구였음을 드러내는 장치로 전락한다. 자기암시와도 같은 발화를 통해 선명해지는 건 현실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는, 고로 현재의 나는 결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참담함뿐이다. 백은선이 상상하는 가능세계란 그러므로 (불)가능세계이자 절대 맞닿을 수 없는 현실과의 평행선이다.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먼 두 세계는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 숲// 그리고 영원”(‘1g의 영혼’)에 가까울 것이다. 그 가운데에 위태로이 놓인 시인은 차라리 끝장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며 되뇌어보지만 절대 아무것도 끝장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가능세계의 불가능성, 이 잘 짜여진 기만 앞에 이제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없을 수 없는 없음

끝장나지 않은 채 “(끝없이)(계속 끝없이)”(‘조롱’) 상영되는 현실은 괄호와 같다. 가두고 구속하며 속박하여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견고한 장벽. 그곳에 갇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미친 듯 갈겨쓰며 괄호 안을 채우는 일뿐이다. 백은선의 시에 유난히 ‘쓰는 행위’에 몰두하는 화자들이 등장하는 까닭 역시 이러한 불가항력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은 자신이 삼차대전으로 핵이 터진 후 남겨진 사람들과 공동 셸터에서 지내고 있다고 믿었던 소녀의 기록이다. 그녀는 아홉 살이 되던 해, 반복적인 망상과 발작으로 처음 내원했고 열다섯이 되던 해 병동에서 투신했다./ 우리는 그녀의 일기를 발견했고 병증의 이해를 목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부분을 발췌하여 보관한다.// 2086년 3월5일/ 연구소장

(중략)

얼마나 더 써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써댈 수 있냐고 스스로 묻는다 스스로 묻고 여기에도 적어놓는다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었고 우리는 추위를 대비해 열매와 땔감과 마른풀을 모았다 얼마간은 이렇게 생존할 수 있을 거야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중략)

우리는 사랑에 관한 비유들로 낱말 놀이를 하기로 했어// 너는 치즈, 소금, 얼음이라고 말했어/ 나는 입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웃었어// 왜 사라진 것들뿐이니// 구름, 바람, 비라고 내가 대답했어// 그렇다면 도처에 사랑이 있겠네// 빈정대며 네가 말했지//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우리라고

-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부분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은 한 편의 시가 된다. 백은선에게 시 쓰기란 “삼차대전으로 핵이 터진” 이후를 기록하려는 마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도무지 끝장날 기미라고는 없는 폐허지만, 쓰고 있는 화자는 일순 자유롭고, 심지어는 “작은 세계를 주무르는 어린 신이 된 것처럼”(‘月皮’) 전능하다. 그러나, “얼마나 더 써댈 수 있을까”. “반복적인 망상과 발작”을 외면한 채 쓰는 글은 얼마나 오래, 멀리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떨쳐낼 수 없는 기억과 슬픔을 한껏 적재한 영혼은 앞으로 “얼마나 더 써댈 수 있냐고 스스로 묻는다”.

병증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 또한 핵이 폭발한 이후의 셸터는 그러므로 화자가 설정한 이중의 도피처일 뿐이다. “사랑에 관한 비유들로 낱말 놀이를 하”는 화자는 사실 말해야 할 것이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우리”라고 말하는 대신, “구름, 바람, 비라고” “비유 단지 비유로만” 이야기한다. “운명을 믿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사랑을 발음하지 않고 도처에 널린 허울로 진실을 모면하는 화자의 모습은 이 시를 관통하는 듯하다. “먹을 것과 땔감을 구하지 못한다면 셸터 안도 곧 폐허가 될” 게 뻔하듯,⁴ 좌우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창조한 세계 역시 금세 허물어질 것이다. 사랑을 사랑으로서, 슬픔을 슬픔으로서 마주하지 않고 “들통난 거짓을 다시 꾸며 말하”는 이상, 백은선 시의 화자가 행하는 하는 쓰기는 “도망친 두 사람에 대한 소설”(‘기울어지는 경향’)에 불과하다. 이때의 “두 사람”은 물론 모두 그 자신을 가리킨다. 직면하지 않은 채 (불)가능세계 중 한 곳으로 숨어버린 지금의 ‘나’와, 그로 인해 끝끝내 수습되지 못하는 그때의 ‘나’.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또한 이곳에 방치된다.

아니요 아니요 구름 아니요 책 아니요 껌 아니요 소주 아니요 고양이 아니요 재미없어요 나는 속고 싶다 나를 속여줬으면 좋겠다 나는 웬만한 것에는 속지 않는다 나는 구름과 책과 껌과 소주와 고양이로 속지 않는다 나는 계속된다 아니요 아니요 나는 아니라는 말에 의해서만 계속될 것 같다

(중략)

무엇이든 아니라고 먼저 말해볼 것이다 부정하고 부정한 다음 지켜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프다는 느낌만이 가장 확실할 것 같고 그 감각을 지키기 위해 고통 속에 머물 텐데 그 고집이 너를 계속 혼자 남게 할지 모른다 아니야 아니야 너는 아니야 그런 말 다음에도 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부정도 부정할 텐데

- ‘비좁은 원’ 부분

이렇듯 속임수와 부정은 백은선 시의 화자가 보이는 방어 기제이다. “나는 아니라는 말에 의해서만 계속될 것 같”으므로, 화자는 온갖 것들을 부정하며 제발 누군가가―그게 설령 화자 자신일지라도 “나를 속여줬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현실을 속일 수 있다면, 그래서 있었던 일을 없었던 셈 칠 수 있다면 화자는 마침내 자신을 옭아매던 권태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셸터”를 상상하는 일과 “사랑”을 외면하는 일이 그러했듯, 부정의 방식 또한 미봉책일 뿐이다.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장면들로 인해 화자가 아무리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언정, “나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곳에 남아 부정을 또 다시 부정해야 한다. 설령 “아니요”를 통해 무엇이 정말 없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은 없음으로 없는가?”(‘프랙탈’) ‘포르트fort-다da 놀이’에서 아이가 던진 실패가 반드시 아이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는 것처럼, 나에게서 떠나‘간’ 것들은 ‘여기’로 다시금 귀환한다.⁵⁶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방식을 통해 대상과 거리를 벌려 확보한 ‘없음’은 일시적이며, 그마저도 침묵과 불안의 ‘있음’을 담보로 해야만 없을 수 있다. “없는 것은 없음으로 없”지 않다. 단지 없음으로써 있을 뿐이다. 예견된 실패는 백은선 시의 화자를 더욱 아프게, 또한 슬프게 만든다.

당신이 기억하는 모든 장면을 적어주세요⁷

그렇다면 “끊임없이 돌아오는 나선의 감각”(‘적심(摘心)’)은 영원히 아프며 기어이 슬픈 장면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걸까. 없음이 있음에 대한 부정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라면, 있음의 방식은 어떨까. 무언가가 눈앞에 없다고 인지할 때, 이는 필연적으로 있음에 대한 좌절을 수반한다. 없음의 짝은 있음이다. 없음은 있음을 데리고 온다. 그러나 있음은 그 자체로 고스란히 있을 수 있다. 그 무엇도 전제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있다. (불)가능세계로 도망가지 않고 해야 할 말을 외면한 채 비유하지도 않으며 거짓말로 현실을 덮지 않고도, 있음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무엇이든 일단은 있다고 써보기로 했다. 새벽 숨소리로 가득한 방에 누워 무엇이 있나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려본다. 나는 네게 전화하고 싶다. 너에게 이런저런 안부를 전하고 나의 커다란 사전을 읽어주고 요즘도 피자를 좋아하는지 애인과 잘 지내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노래를 듣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기다려야 하니까 그러지 않는다.

- ‘프랙탈’ 부분

그러니 “무엇이든 일단은 있다고 써보기로 했다”. 백은선 시의 화자는 온전해지기 위해 이제 자신의 곁에 실재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시상을 기다리던 순간 어둠 속에서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너’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충동이다. ‘너’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그 정체를 궁금해하지는 않기로 한다. 다만 이렇게는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나’가 뭐라도 써보려고 마음먹은 순간 가장 먼저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이며, 세계를 충만하게 만드는 첫 번째의 존재라고. 만약 ‘너’에게 전화한다면 ‘나’는 “너에게 이런저런 안부를 전”할 수 있을 테고, 간직하고 있던 무수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 역시도 얻을 수 있을 테다. 그럴 수 있다면, 가능성이 단지 가능성으로만 종결되지 않은 채 현실이 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린 우리에게 우리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되”(‘지옥으로 가버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는다.” 기다려야 하는 까닭이다. 이제 관심은 ‘나’가 기다리고 있는 무엇, 나아가 그를 기다리는 이유에 맞춰진다. 기다림의 대상을 ‘너’로 상정하는 데에 그친다면 이 시는 간편하고 손쉬워진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것뿐일까? 가능성의 지연은 기다림이 숨긴 속뜻이다. 화자가 차마 ‘너’에게 가닿을 수 없는 까닭은 ‘너’의 있음이 증명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중요한 무엇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기분”(‘퀸의 여름’)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테다. 백은선 시의 화자는 여전히 자폐적인 세계에 갇혀 끝장을 기다리던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동시에 끝장을 바라는 그의 태도를 통해 세계는 지속된다.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백은선의 시, 그리고 세계는 사실은 그 무엇도 끝장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밀한 소망을 배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상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두려우며 또한 망설여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미룰 수는 없다. 기껏 결심한 ‘있음’이 무용해지기 전에, ‘나’는 견고한 괄호로부터, 안락한 셸터로부터, “비좁은 원” 그리고 마침내 설원으로부터 박차고 나와야 한다. “싫고 좋고 이상”한 ‘너’를 만나야 한다.⁸

너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이제 손 놔, 나는 흠칫 놀라 네 손을 놓쳤다. 한겨울 눈 쌓인 벌판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눈밖에 없어서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점점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따라가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런데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한참 멈춰 있다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을 때/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 붉은 노을은 감은 눈 속에서 번지는 고동 같았다.

(중략)

보라색 꽃이 창밖에 피었다. 눈은 온데간데없이 녹아 사라지고 나무둥치에 박아두었던 도끼는 자루가 썩어 빈 날만 낮 동안 반짝인다. 그때 네 뒤를 쫓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궁금했다.// 손을 놓는다는 게 영영 손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서. 뜨거운 입김이 피어오르던 눈밭의 한기를 다 잊지 못해서. 기적(奇蹟)이 기이한 자취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어버려서.// 마당에 어린 대추나무를 심었다. 잎들이 작은 동전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수지(壽指)라 이름 붙였다.

- ‘수지(壽指)’ 부분

상실을 경험한 사람의 앞에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놓인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잊거나, 혹은 잃은 것을 놓아주거나. 백은선의 시는 지금껏 차라리 잊기를 택해왔다. 그러나 망각은 안녕이 될 수 없기에 “아이는 그 자리를 볼 때마다 사라진 것”(‘비유추의 계’)을 생각하게 될 테고, 그렇게 거듭하여 내리는 눈을 맞으며 몇 번이고 까닭 모를 슬픔에 파묻히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 길었던 유예를 끝낼 차례이다. 단지 말뿐인 끝장 말고, 완연한 안녕을 발음하며 오래 방치했던 마음에게 해묵은 인사를 건네기. 너무나도 긴 시간을 그곳에, 또한 이곳에 내버려둔 채 많이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보기. 마치 폭설처럼 적재된 시간, 그 더께를 쓸어내리기 위해서는 ‘헤어짐의 언어’가 필요하다.⁹ 잊어서는 안 되는 순간을 잊으려 하지 않고, 다만 소복소복 쌓여간 슬픔을 성실하게 기억하는 일은 ‘너’와의 만남을 비로소 작별을 가능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 시의 ‘나’를 ‘너’로, 혹은 ‘너’를 ‘나’로 바꾸어 읽는대도 괜찮다. 중요한 건 두 사람―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다른 한 사람에게 “이제 손 놔”라며 말할 준비가 되었다는 점이다. “손을 놓는다는” 건 “영영 손을 잃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어서, 온통 흰빛인 설원에서 붙잡을 손 하나 없이 혼자가 되는 건 몹시도 무서우니까 ‘나’는 잠시간 ‘너’를 잡고픈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범람하고 범람하는. / 이계異界의 페이지를.”(‘아름답고 무거운 책’), 시작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어느 소설을 이제는 정말 갈무리할 시간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적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날에, “그때 네 뒤를 쫓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간 미친 듯 갈겨썼던 글들이, 그 모든 (불)가능세계가 한낱 기이한 서적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이제야 안다. 궁금한 일은 궁금한 일로,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로 가만히 둔 채 ‘나’는 “마당에 어린 대추나무를 심었다.” 나무의 이름은 “수지(壽指)”. 그 정확한 의미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을 테지만, 왠지 예감이 좋다. 아직 어린 나무가 제법 울창해질 때쯤, ‘너’는 아득한 과거에서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너의 미래에 내가 없어서 좋아”(‘역할 바꾸기’). 그러는 동안 ‘나’는 “지금의 나무”가 지닌 파란 빛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각자의 자리를 찾는다.

너랑 나는 화단에 앉아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계속해서 거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어떤 음파뿐이래. 그래 그건 정말 사랑인 것 같다. 그걸로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얘기하며 화단에 앉아 옥수수를 먹었다.

(중략)

오늘은 너랑 소파에 앉아 시간이 길게 길게 늘어지다가 뒤집혀버리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쩔 때는 림보에 갇혀 있는 기분도 든다. 그치만 행복한 무엇이 무형의 뿔처럼 조금씩 자란다. 나는 현상과 감정에 무연해지고 있다. 너도 그렇다고 했다. 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나도 생각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이후와 이후에 씌어진 시와 그 시의 이후에서부터 다시 씌어진 이후와…… 이것을 무수히 반복한 다음.

바다에서 떠내려온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주웠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 ‘사랑의 역사’ 부분

지난했던 슬픔에게 안녕을 고한 백은선은 이제 사랑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 그가 호명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금 반복이다.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고 그걸 다시 녹음하고 녹음한 걸 다시 틀고 다시 녹음하고 또 틀고 또 다시 녹음하”는 과정의 끝에 사랑이 발견된다면, 슬픔과 사랑의 메커니즘은 정확히 같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외면하지 않으며, 오히려 선명하게 안다. 비록 “어떤 음파”의 원본이었던 장면은 희미할지언정 내가 한때 그것을 살아냈다는 사실만은 ‘나’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잘은 “모르지만 너무 슬플 것 같”은 기분이 밀려와 ‘나’를 또 다시 눈보라 속에 던져놓더라도, ‘나’는 “시간이 길게 길게 늘어지다가 뒤집혀버리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금은 너그러이 여겨볼 수 있을 것이다.

감히 떨쳐내거나 잊어버릴 수 없는 세계, 다만 그 역시 나의 세계. 나를 슬프게 만든 아픔들은 고스란히 남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어느새 “행복한 무엇이 무형의 뿔처럼 조금씩 자란다”. 이 탁월한 ‘있음’의 감각 속에서 백은선은 “그 이후에 무엇을 쓸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부지런히 “오늘 새로 태어난 슬픔”(「모자이크」)의 자리를 마련한다. 오래전의 아픔이 “닳고 반짝이는 유리조각”으로 떠내려온다. 희고도 파랗게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소중히 손에 쥐어보아도 베이는 곳 하나 없다. 동글동글 무뎌진 슬픔은 더 이상 나를 상처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끝없이 상영되는 어느 필름은 사실 여태껏 살아온 “가까스로의 날들”(‘月皮’)의 기특한 방증임을 이제야 안다. 많이도 아팠던 기억을 꼭꼭 삼켜 내 것으로 만드는 힘. 흉터 가득한 몸으로 다시금 사랑하는, 외계인과 같은 초능력은 그곳에, 또한 이곳에.

비로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

각주>>

¹ 이 글은 백은선이 출간한 네 권의 시집 <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든 필름>(현대문학, 2019), <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을 주요 텍스트로 한다. 본문에서 상기한 시집들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작품명만 표시하기로 한다.

² “절망 속에서 바로 그 절망이 만들어낸 자학과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데서 발생하는 힘으로, <가능세계>는 더 깊은 절망, 완전한 끝을 향해 내달리기 때문이다.” 이재원, ‘김준성 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21세기 문학> 2017년 여름호, 13~14면.

³ ‘소유되지 않은 경험(unclaimed experience)’의 변용이다. 소유되지 않은 경험은 “그 사건이 자신에게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험”을 가리킨다.(이진숙, ‘트라우마에 대한 소고’, <젠더와사회> 제24집, 신라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2013, 184면.)

⁴ 조연정 해설, ‘소진된 우리’, <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220면.

⁵ ‘포르트fort-다da 놀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S. Freud, <쾌락 원칙을 넘어서>, 이형진 옮김, 열린책들, 1997, 19~25면.

⁶ 아이가 창조적 행위―da의 주체가 됨으로써 상실―fort를 지배하고자 한다는 것이 이 놀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 글이 ‘포르트fort-다da 놀이’를 언급한 것은 보편적인 해석에서처럼 창조를 통한 ‘없음-있음’을 긍정적으로 보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이 글은 아이가 압도적인 불안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여 포르트fort-다da 놀이와 백은선의 시를 병치하고 있으며, 놀이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프로이트의 것보다는 차라리 슬라보예 지젝의 견해와 가깝다. S. zizek,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 분석>, 주은우 옮김, 한나래, 1997, 79면.

⁷ 백은선, ‘조롱’,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현대문학, 2019, 22면.

⁸ 백은선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문학동네, 2021)의 제목을 변용하였다.

⁹ 카루스는 친구 칼릴의 죽음을 경험한 열일곱 살 소년 그레고리가 칼릴의 엄마 버나뎃과 나눈 인터뷰를 통해 ‘헤어짐의 언어’에 관한 사유를 전개한다. 버나뎃은 그레고리에게 칼릴의 소지품 중 가진 것이 있냐고 묻는데, 그레고리는 생뚱맞게도 “칼릴이 제 걸 가지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칼릴은 이전에 그레고리가 자신에게 준 셔츠를 입고 영면에 든 것이다. 카루스는 그레고리의 발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셔츠를 칼릴이 끝내 가져 갔다는 말에 내포된 농담은 칼릴 생전에 그들이 맺고 있던 바로 그러한 장난스러운 관계를 재창조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레고리는 이렇게 하여 사실상 자신의 셔츠를 향해 ‘떠났다!’고 말하고, 그럼으로써 칼릴과 새로운 관계, 즉 의인화의 허구 속에서조차 결코 좁힐 수 없는, 칼릴의 죽음과 자신의 삶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인정하는, 그러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Cathy Caruth, ‘헤어짐의 말들 트라우마, 침묵 그리고 생존’, <문학과사회>, 이형진 옮김, 2014년 가을호, 344면.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