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신의 글쓰기, ‘김윤식 전시회’에서

2025-01-02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밋밋하게 끝나지 않고 뿔처럼 하루가 더 있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12월31일. 복면한 괴한인 듯 아라비아 숫자 즐비한 달력에서 지난 1년을 휘감으며 등대처럼 밝힌다. 그냥 하루, 여느 날처럼 지나치기엔 내 간이 너무 작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건 비장한 일이다. 기괴하고 희한한 일들이 마구마구 범람해서 정신을 모으기가 몹시 힘들다. 해가 뜨고 다시 달이 뒤쫓아 오기까지,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의 보자기에서 이 마지막 날은 목석같은 나에게도 좀 특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으로 다시 못 볼 갑진년을 마무리할까.

참 수상한 시절, 그저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들이 변덕을 부리지만 그 와중에도 무겁게 지그시 제자리를 누르며 중심을 잡아주는 것들이 있어 이나마 세상은 이렇게라도 유지된다. 산이 제 높이를 지탱하려고 무거운 돌이나 바위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처럼.

허황한 말들이 활개치는 이 부박한 지상의 표면에서 사람의 생각을 무겁게 받드는 책이라도 없더라면 어쩔 뻔했나. 오늘이 아니라면 이젠 더 볼 수 없는 마지막 기회. 서울대학교 규장각 전시실로 향했다. ‘혼신의 글쓰기-김윤식의 한국현대문학사’ 전시회를 보기로 한다.

거개의 일생을 생로병사의 현상과 희로애락의 성분으로 인수분해할 수 있다면, 문학평론가 김윤식(1936~2018)의 그것은 이렇게 나눌 수 있겠다. 읽다, 쓰다, 가르치다. 단독 저서 151종, 공저 13종, 편저 28종, 역서 6종, 편·감수 저서 3종 등 200여종의 책들. 그런데도 책의 너머를 이미 만난 듯 생전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에서는 이런 인터뷰 영상이 흐르고 있다. “책이라는 것은, 아무리 굉장한 책이라도 시쳅니다, 시체. (…) 말하자면 서재라는 것은 공동묘지입니다. 거기다가 내가 몸을 빌려줬을 때에 거기에 피가 돌고 그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전시장을 마지막으로 나서는데 작은 소장품이 눈길을 붙든다. 목숨이 정확하게 지나가는 손목을 지그시 눌렀던 것. 부산의 노점에서 일금 5000원에 구입했다는 물품. 이제는 선생이 몸을 빌려주지 않아서 뻣뻣해진 시계가 3시31분19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낮과 밤은 물론 오전과 오후조차 훌쩍 뛰어넘은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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