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교화 말하는 서양의 편견, 오리엔테이션

2025-01-04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보려고 책상 한편에 쌓아놓은 책들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전에는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 미리 책을 주문하여 항상 볼 책이 쌓여있었는데, 이번에는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습니다. 새 책만 계속 볼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았던 책 가운데서 기억에 남는 책을 다시 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닥이 드러나자 ‘무슨 책을 볼까?’ 하며 책장을 둘러보는데, 그런 내 눈에 먼저 《미술쟁점》이란 책이 들어왔습니다.

최혜원 씨의 호 청련(靑蓮)은 푸른 연꽃이란 뜻이겠지요? 청련은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직접 화가로도 활동하면서 아트컨설팅, 경매기획자 등의 일도 하고,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강좌에서도 미술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조선일보에 「명화로 보는 논술」을 연재하였는데, 이 책은 그렇게 연재한 글을 중심으로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책 제목이 《미술쟁점》이지요? 책 제목에서부터 시중에 널려있는 일반 미술이야기 책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청련은 책을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수많은 명화를 보고 있자면 수백 년 전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삶과 생각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살고 있었던 사회는 어떠했는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흥미롭고도 놀라운 경험이다. 내가 그랬듯이 여러분들도 이 책을 통해 인생의 선배들과 만나 세상이야기를 나누길 바란다. 뜻밖에 우연히 만나는 것을 조우(遭遇)라고 한다. 여러분들도 이제 미술관에서 만나는 한 점의 그림을 통해 미지 세계와의 조우를 경험해 보기 바란다. 이는 분명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예! 청련이 장담했듯이 이번에 다시 책을 보았지만, 책을 보는 내내 저는 즐거운 경험을 다시 하였습니다. 책의 차례를 보면 1부 <그림으로 본 예술 쟁점>에서는 ’천재와 미치광이는 종이 한 장 차이?’, ‘영원한 동반자 혹은 적, 미술과 종교’, ‘공공미술,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야할까?’ 등처럼 미술에서 항상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풀어봅니다. 그리고 2부 <그림으로 본 사회쟁점>에서는 ‘미술 속 성차별’, ‘문화재 약탈 - 루브르는 과연 프랑스 박물관인가?’,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 친일미술’ 등 벌써 제목만 보더라도 그림을 통해 중요한 사회 쟁점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냥 미술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일반적인 미술책과 달리 청련은 정치, 역사, 문학 등 미술을 뛰어넘은 여러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미술 전문가가 자기 영역을 뛰어넘은 다른 분야까지 다루려면 공부도 꽤 많이 해야 했을 테니까요.

그리고 「명화로 보는 논술」에 연재했던 글이 중심이 되다 보니, 한 편의 글 마지막에는 [생각해보기]라고 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고, 마지막에는 [더 생각해보기]라고 하여 핵심적 문장으로 타성에 젖어있는 우리의 두뇌를 때립니다. 이를테면, ‘미술에 나타난 동서양의 내세관’이란 글에서는, [생각해보기]로 연예인의 자살을 논하며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때문에 나타난 ‘베르테르 효과’도 얘기합니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보기]에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뇌사 상태에 있는 아들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아버지에게 살인죄가 적용되었다고 한다. 회생 불능의 판정을 받고 생명연장 장치에 의해 살아가는 많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고통을 받으며 무의미한 치료로 더 중요한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도 한다. 과연 그 아버지의 행동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품위 있게 죽을 권리는 인정되어야 할까?”

어떻습니까? 시중에 널려있는 많은 미술이야기 책 가운데에서 《미술쟁점》은 푸른 연꽃처럼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너무 책 위에서 빙빙 돌며 개괄적인 얘기만 한 것 같군요.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청련이 얘기하는 구체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지요. 1부 <그림으로 본 예술 쟁점>에서는 ‘미술과 정치, 그 멀고도 가까운 사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히틀러의 <퇴폐 미술전>이라고 아십니까? 히틀러는 독일 게르만 민족의 인종적 우수성을 찬양하고 전쟁의 승리와 애국심을 드높이는 예술만을 진정한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의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은 퇴폐미술로 간주하여, 퇴폐미술가로 낙인찍은 화가들의 작품 1만 7,000여 점을 압수하여 그 가운데 5,000점 이상은 불태워버렸습니다.

히틀러가 퇴폐미술가로 낙인찍은 작가는 세잔, 고흐, 고갱, 마티스, 샤갈, 미로, 뭉크 등 지금은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뛰어난 유명 화가 대부분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너는 639점이나 되는 작품을 압수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습니다.

히틀러는 1937년 7월 18일 자기들 입맛에 맞는 작품들을 모아 <위대한 독일미술전>을 열었고, 바로 그다음 날에는 <퇴폐미술전>을 열었습니다. <퇴폐미술전>은 마치 골목길을 연상케 하는 좁은 복도에 다닥다닥 그림을 붙여 걸었고, 조명도 형편없었습니다. 그림은 액자도 없이 걸렸으며 심지어 바닥에 마구 세워놓기도 했습니다. 한 독재자가 자기 멋대로 명화를 퇴폐미술로 재단하고 조롱하고 불태워버리는 등 예술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자행하였으니, 이는 미술 분야에서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버금가는 잔혹한 행위였군요.

미국에서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윌렘 데 쿠닝 등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가 인기를 끌지 않았습니까? 추상표현주의가 이렇게 인기를 끈 데에는 뒤에서 은밀히 이를 지원한 CIA의 영향도 컸다고 하네요. 사회주의권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술이 고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면서 대중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자, CIA는 서방세계의 자유로운 ‘관념적 표현주의’ 미술을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답니다. 이렇게 미술은 정치의 간섭이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청련은 ‘미술과 정치, 그 멀고도 가까운 사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며 이를 책의 맨 먼저로 올렸습니다.

2부 <그림으로 본 사회 쟁점>에서는 ‘오리엔탈리즘 - 서양미술에 담긴 동양에 대한 편견’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트’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처음 오리엔트는 이집트, 중동지방을 말합니다. 서양인들이 보기에 이곳은 해가 뜨는 지방이라 오리엔트라고 했겠지요. 처음에는 이곳이 문명의 기원이었으니, ‘오리엔트’라고 하면 뭔가 신비스럽고 조금은 동경하는 지역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문명의 역전이 일어나면서 ‘오리엔트’는 뭔가 교화시켜야 할 개념으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항해술의 발달로 서양이 아시아로 발길을 뻗치면서 이렇게 교화시켜야 할 지역은 중동을 넘어 전 아시아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은 이렇게 서양의 동양에 대한 편견이 들어간 단어입니다.

우리가 대학 새내기 때 받는 교육프로그램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있지요? 오리엔테이션 역시 오리엔트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이렇게 새내기 교육프로그램을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동양은 교화시켜야 한다는 서양의 편견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당연히 미술에도 스며들어있겠지요. 서양화가들 가운데는 하렘을 그린 화가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은 하렘을 관능적인 여성 노예가 잔뜩 있는 온갖 성적 환상이 가득한 공간으로 상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원래 하렘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까운 친척 이외의 일반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금남의 장소를 말하는 것이었는데요. 아래 그림은 앵그르의 <터키탕>인데, 여기서 서양이 동양 여성을 성적인 호기심의 대상, 눈요깃거리로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양 여자를 눈요깃거리로 보았다면 동양 남자는 어떻게 보았을까요? 남자는 잔인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본 그림들이 많습니다. 아래 그림은 루트비히 도이치의 <담배 피는 남자>인데, 그림에서 보듯이 동양 남자를 하릴없이 태만하고 무기력한 남자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청련은 단순히 서양의 오리엔탈리즘 그림에 대해서만 비판적 글을 쓰지 않고 [생각해보기] 코너에서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도 그런 편견의 오리엔탈리즘이 있지 않은가?’ 하며 우리도 돌아보자고 합니다.

그렇지요. 요즘 우리나라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우리도 혹시 그들과 그들 출신의 나라들에 대해 오리엔탈리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청련은 더 나아가 [더 생각해보기]에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광고 등에서 동남아인들과 영미권 백인들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혹시 우리에게 어떤 차별적인 고정관념을 심어주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이 정도면 청련을 단순한 미술가가 아닌 사회비평가라고 해야겠는데요.

16년 만에 다시 꺼내든 청련의 《미술쟁점》은 나에게 미술을 통해 여러 사회 쟁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망치였습니다. 혹시 청련의 후속 책이 나와 있을까? 하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쉽게도 《미술쟁점》은 2018년에 새로 찍은 것(개정판?) 말고는 새로 나온 책은 없네요. 앞으로 청련의 새로운 역작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푸른 연꽃 청련! 오래간만에 《미술쟁점》 다시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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