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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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19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여러 등장 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8화. 기생의 대부 하규일 선생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 나이 14세 되던 해였다. 나는 대정권번에 몸을 담고 나이 어린 몸으로 우선 공부부터 시작했다.
대정권번은 우리나라 최초의 규약을 만들었다. 최고 우두머리를 1번수라 불렀고, 주(朱)모 선배가 여기에 취임했다. 1번수 밑에 2번수와 3번수가 있었고 그다음은 나이와 연조에 따라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정연했다. 흔히 말하는 깡패 세계에 의리와 계급관념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기생들 사회에도 이와 못지않은 엄격한 상하 구별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서로 부르는 호칭도 꽤 까다로워 한 살 위면 언니(평양에서는 ‘형애’)라고 불렀고 두 살 위면 형님, 5년 위쯤 되면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 아주머니라는 말은 퍽 재미있는 뜻을 갖고 있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여자는 애를 잉태하기 마련이고 아기가 배 속에서 10개월간 자라기 때문에 여자란 어찌 보면 ‘아이 주머니’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아이 주머니’가 줄어 아주머니가 되었다는 그때 선배들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무척 재미있고 그럴싸하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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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배들이 후배들을 부를 때는 그냥 기명을 부르면 됐다.
권번에 들어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남의 추천을 받아 오는 이가 제일 많았고, 일부는 본인들이 직접 찾아왔다. 좋은 권번에서 조신한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을 배우고 지체 높은 양반의 눈에 들기만 하면 팔자 고치는 판이라 시집가기 위해 권번을 찾는 여성도 많았다.
권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입회금으로 10∼20원씩 내야 했고, 일단 이름을 올려놓으면 매월 50전씩 회비를 꼬박꼬박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