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날개 먹거리와 일자리] 아르헨 뼈아픈 추락 사례, 우리나라에 반면교사의 교훈

2024-07-03

(24) 일자리 찾아 3만리

소설·애니메이션 ‘엄마찾아 3만리’

오늘날 우리들 현실과도 많이 닮아

이탈리아서 아르헨으로 일자리 찾아

한국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경제부국 아르헨, 1차산업에 안주

2차산업 발전 시키기 위한 적기 놓쳐

한국, 요사이 복지 포퓰리즘에 ‘입맛’

‘후진국으로 추락’ 비아냥 거림 막아야

◇말도 안 돼! 이탈리아 엄마가 아르헨티나(Argetina) 가정부로?

이탈리아 소설가에드몬드 데 아미치스(Edmondo De Amicis, 1846~1908)는 1886년 10월 18일 ‘쿠레오(Cureao, 영어 Heart)’소설을 발표했다.

1958년 우리나라 만화가 김종래(金鍾來, 1927~2001)는 ‘쿠레오’ 가운데 어린 남자아이 마르코의 일기(diary of a young boy Marco’s life)를‘엄마 찾아 3만리’로 고전 사극 형식으로 각색(脚色)해 출판했다. 최초 베스트 셀러 만화책으로 1964년까지 10쇄를 찍어냈다. 드디어 2013년에는 그 만화 원화(原畵)가 국가 문화재 제539호로 등재되었다.

일본에서 1972년에 ‘엄마 찾아 3천리(母をたずねて三千里)’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이를 다시 각색하여 1990년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상영했다.

왜 어린 마르코(Marco)가 혼자서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Argentina)까지 가게 된 사연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과도 많이 닮아있다. 당시 아버지는 빈곤한 이웃 사람들을 위해 무료진찰(無料診察)을 할 수 있는 클리닉(Clinic)을 빚내어 개원했다. 그런 의원 운영으로는 생활비(生活費)는 고사하고 독촉하는 빚의 이자마저도 상환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엄마는 부자나라 아르헨티나(Argentina)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한 부잣집의 가정부(家政婦)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철도 학교에 다니면서 기관사의 꿈을 키워갔던 형은 견습생(見習生)으로 하루도 쉬는 게 불가능했다. 그런데 인편으로 전해 들려오는 소식은 엄마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두 눈으로 엄마 모습을 꼭 확인하고 싶다는 마르코는 열망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비록 어리지만 마르코(Marco)는 이탈리아 제노바(Genova)에서 아르헨티나(Argentina) 수도로 향해 떠나기로 했다. 마르코(Marcos)의 당시 심정을 1993년 가수 이선희(李仙姬, 1964년생)는 ‘엄마 찾아 삼만리’로 “아득한 바다 저 멀리. 산 설고 물길 설어도. 나는 찾아가리. 외로운 길 삼만리. 바람아 구름아. 엄마 소식 전해다오. 엄마가 계신 곳, 예가 거긴가? 엄마 보고 싶어 빨리 돌아와 줘요. 아 외로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길...”라고 노래했다.

말도 안 돼! 오늘날 G7 선진국 이탈리아에서 후진국 아르헨티나(Argentina)에 가정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실체적 진실(real fact)이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었다.

6·25전쟁으로 잿더미였던 한국에 오늘날 외국인 근로자로 120만 명이나 일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그들은 대다수 고국에 자녀를 두고 왔다.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엄마 찾아 3만리’ 한국행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1960년에서 1970년대 열사(熱沙)의 땅 중동사막(中東沙漠)에서 건설 인부로, 생명 수당을 받아가면서 베트남 전쟁터에 병사로, 그리고 이역만리(異域萬里) 독일 땅에서도 ‘글뤽 아우프(Gluck auf, 살아서 만납시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지하탄광으로 들어갔던 광부도, 영안실에서 시신(屍身)의 똥과 체액을 닦았던 간호부도 일자리를 찾아 서독(西獨)까지 갔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한국도 언젠가는 아르헨티나처럼 경제가 나락(奈落)으로 떨어진다면? 우리는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서 이역만리 외국으로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Argentina)는 100여 년 전 팜파스(Pampas)의 비옥한 대초원에서 산출되었던 풍요한 곡물과 쇠고기 등을 수출하여 1인당 소득이 세계 10위였던 경제부국이었다. 당시 최대 부국이었던 대영제국에 비교해도 95%에 해당하는 실질소득을 가졌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는 ‘남미의 파리(Paris of South America)’라고 불렸다. 1913년 수도 도심에 세계 최초 지하철이 개통되었고, 전국 주요지역이 철도망으로 연결됐다. 1880년부터 노동력 부족 현상에 당면하자,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근로자 이민(勤勞者 移民)을 받아들였다.

물론 우리나라도 1965년 8월17일 아르헨티나 리오 네그로 주(Rio Negro Province, Argentina) 라마르께(La Maarque) 영농 이민단(營農 移民團)으로 1진(陣) 13세대 78명이 부산항을 출발해 떠났다. 그해 10월15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착했다. “백만장자(百萬長者)”를 꿈꾸면서 떠났던 우리나라 이민단은 영농자금, 농기계 등의 아무런 준비도 없는 빈손에다가 알몸덩이였다. 초원황무지에 영농은 고사하고, 당장 생계마저 위협을 받았다. 척박한 아르헨티나의 초원황무지(草原荒蕪地) 환경에 고생만 엄청했다. 결국은 한 사람씩 도시로 모여드는 재이주를 했다.

선진국 가운데 10대 경제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농업, 축산업 등 1차산업에 너무 안주했다. 그런 나머지 제조업과 같은 2차산업을 발전시킬 적기를 놓쳤다. 그 결과 국가경제는 침체와 악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2022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13,650달러의 중진국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그런데도 제대로 정신을 못차리고 ‘페론주의(Peronism)’라는 과도한 복지 포풀리즘(excessive welfare populism)정책에 입맛을 들였다. 아르헨티나의 국력을 소진하는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복지 포풀리즘은 마약중독(drug addiction)과 같았다. 우리나라도 요사이 복지 포퓰리즘(welfare populism)에 살살 입맛을 들여가고 있다. 이는 곧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를 향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서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이런 뼈아픈 아르헨티나의 추락사례는 오늘날 우리나라에 반면교사의 교훈을 분명히 던져주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의 전철(前轍)을 밟는다면, “한 세기 안에 한국전쟁 잿더미에서 선진국으로 부상했다가 다시 후진국으로 추락한 유일한 한국”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세계인들로부터 받을 것이다. 1971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 1901~1985)의 경제발전모형(economic development models)에서 i) 선진국 모델, ii) 후진국 모델, iii) 일본모델, iv) 아르헨티나 모델(Argentina Model)를 제시했다. 우리나라가 후진국으로 추락하면 제5 한국형 모델(Korea Model)로 제시된다. 일본모델(Japan Model)은 한 세기 안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국가가 일본뿐이다. 아르헨티나는 역으로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한 사례였다.

2014년 2월 17일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에서는 “공산권을 제외하면 20세기 경제의 최대 실패 사례는 아르헨티나이다”라고 했다.

글=김도상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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