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에서 산업으로, 실험에서 실용으로.” 산업기술의 전환을 고민하는 현장에서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단순한 자동화나 데이터 분석을 넘어, 산업 전반의 지능화 전환을 이끄는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산업 현장의 AI 활용도는 여전히 낮은 수준으로, 2023년 기준 국내 제조업의 AI 도입률은 2.7%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기업은 초기 투자 비용, 데이터 인프라 구축, 전문 인력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AI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AI 결과물에 대한 신뢰성 검증 문제나 모델의 지속적인 개선·유지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AI를 통한 기술 자립과 산업 구조 재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이에 국내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AI 연구개발(R&D) 추진 전략과 과제 지원이 절실하다.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은 지난 10년간 약 846건의 AI 관련 과제에 총 1조5000억원 규모의 정부 출연금을 투입해 왔다. 딥마인드(Deep-mind) 등장 시기에는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 개발 지원을, 202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공장용 시스템 제어, 수술용 증강현실(AR), 금융 의사결정 지원 솔루션 등 산업 지능화 분야에 AI 연관 R&D를 집중 지원했다.
2024년에는 생성형 AI가 산업과 일상 속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AI 신규 과제가 전년 대비 3배나 증가해 212건, 출연금은 1491억원으로 확대됐다. 특히, 올해 신규 예산의 60%가 공고된 지난 1분기까지 산업별 AI 과제는 전체 474건 중 131건(28%), 정부출연금 기준 1114여억원(34%)을 차지했다.
우리나라 범용 AI 기술력은 선진국에 비해 다소 부족하지만, 산업현장에 바로 적용 가능한 실용 AI 기술은 충분한 경쟁력과 성장 잠재력을 갖고 있다. 특히 제품과 공정 특성에 최적화된 맞춤형 AI 기술은 국내 산업 환경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디지털 트윈, 소형화된 모델, 엣지(Edge) 기반 AI 처리 기술 등은 실제 제조 라인과 서비스 현장에서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으며, 빠른 실증과 내재화가 가능한 분야로 주목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신규 AI R&D 과제 전반에 걸쳐 확인되는 공통된 흐름은 '경량화' '온디바이스(On-device)' '실증 기반'이다. 즉, 산업 현장에서 즉시 판단·제어 가능한 AI 시스템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중소기업 및 전통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는 이런 실증형 AI 기술의 보급이 필수다.
예컨대, 제조공정에서는 비전 인식과 로봇 기술이 접목되면서, 복잡한 변수에 자동 대응이 가능한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공정 간 최적화나 예측 모델링 기술은 초기 단계지만, 유연한 실증 환경과 디지털 트윈 구축 역량을 바탕으로 강화학습 기반 제어 시스템이나 실시간 의사결정 기술의 신속한 적용이 가능해 지고 있다. 바이오, 배터리, 화학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고, 에너지 절감과 친환경 전환이 가능한 R&D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AI 하드웨어 및 요소기술 분야는 산업별 AI 확산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최근 응용 특화형·현장 맞춤형 기술 개발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범용 GPU보다는 고속 연산과 저전력을 동시에 충족하는 경량형 엣지 AI 칩셋의 수요가 자율주행, 정밀의료, 스마트 제조 분야에서 높아지고 있다. 이에 KEIT는 산업 특화형 AI 반도체 R&D를 통해 기술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엣지 컴퓨팅 시대에 대비하려 한다.
AI는 신물질 발굴 분야에도 핵심 도구로 자리하고 있다. 독성 예측 분야에서 외산 소프트웨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국산 데이터베이스(DB) 및 연동형 실험 시스템 확보도 추진하려 한다. 특히,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용 고성능 소재 개발에서는 AI 기반 시뮬레이션을 통해 정밀 설계를 가능하게 하며, 양자점(Quantum-dot, QD) 디스플레이 분야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스마트 헬스케어, 질환 보조기기, 물류 자동화 장비 등 실시간 판단과 제어가 필요한 분야에는 고속 연산과 강화학습 알고리즘을 탑재한 임베디드 AI 기술 기반의 온디바이스 기술을 적극 지원한다. 이와 함께, 생성형 AI와 예측형 AI를 복합 적용한 스마트센서를 활용하여 지반침하 감지, 의료영상 분석, 드론 탐지 시스템 등의 고도화도 추진 중이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공공데이터, 의료 빅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고, 높은 수준의 IT 인프라가 이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다. 데이터 분석, 설계 자동화, 고객 맞춤형 사용자경험(UX) 개선 등을 가능케 하는 생성형 AI 개발 지원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 가능성도 모색한다.
AI 기술이 산업 현장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신뢰성, 안전성, 상호운용성 확보가 필수이다. 이를 위해 R&D와 함께 국제표준 개발도 병행해야 한다. KEIT는 반도체, 의료, 제조 등 주요 분야에서 국제표준화 활동을 선도하고 있으며, 글로벌 시장 진입을 위한 기반 구축에 힘쓰고 있다.
지금은 AI의 산업 적용이 본격화되는 중요한 시기다. 국가 산업 구조에 맞는 AI 기술을 조기 확보하고, 실제 AI가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기업의 생산성이 향상되는지 면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일자리 구조의 변화 등 사회적 요소도 고려한 누수 없는 R&D 전략 수립과 실행이 필요하다. AI R&D를 바탕으로 지능화된 산업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대한민국 산업의 미래를 여는 열쇠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 원장 art@keit.re.kr
〈필자〉 정책·경제·통상 분야에 능통한 관료 출신 기관장이다. 군산제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영국 리즈대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행정고시 36회에 합격해 1993년 상공자원부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지식경제부 투자유치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정책기획관·통상협력국장·통상교섭실장 등을 거쳤다. 주유럽연합(EU)·벨기에 대사관 상무관, KOTRA 교역지원센터장, KAIST 과학기술정책센터 연구교수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2022년 9월 R&D 전문기관 KEIT 원장으로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