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신월’의 고향 튀르키예와 한국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8-16

1859년 6월 이탈리아에선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이탈리아 북부를 점유한 오스트리아 제국을 내몰고 이탈리아 반도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전쟁의 일환이었다. 프랑스계 스위스인 앙리 뒤낭(1828∼1910)은 사업상 목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를 지나던 중 우연히 이탈리아·프랑스 연합군 대 오스트리아군의 교전을 목격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전투 끝에 불과 하루 동안에만 양측을 더해 4만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뒤낭은 다음 행선지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솔페리노에 남아 부상자들 치료 등 구호 활동을 벌였다. 훗날 펴낸 회고록 ‘솔페리노의 회상’(1862)에서 뒤낭은 “이런 상황일수록 누군가는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적었다.

솔페리노에서 겪은 처절한 경험은 평범한 사업가이던 뒤낭을 인도주의 실천 운동가로 바꿨다. 그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인 민간 국제기구 창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럽 국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1863년 뒤낭의 모국이자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창설을 위한 제네바 협약이 체결됐다. 오늘날 ‘적십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뒤낭은 노벨평화상이 제정된 1901년 그 첫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ICRC의 상징인 붉은 십자가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슬람권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1877년 제정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제국(현 튀르키예)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무슬림 국가인 튀르키예 구호 요원들은 적십자 대신 적신월(붉은 초승달) 모양의 표장을 내걸고 부상병 치료와 후송 활동을 했다. 이것이 중동,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로 번지며 오늘날 50개 넘는 나라가 적신월을 사용한다. 한국에 대한적십자사가 있다면 이들 국가에는 ‘○○적신월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적신월의 고향이라고 할 튀르키예 적신월사의 파트마 메리치 일마즈 회장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연인원 2만1000여명의 장병을 한국에 보냈고 그중 1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이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하자 일마즈 회장은 “한국 국민이 6·25 당시 튀르키예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화답했다. 이어 “2023년 지진 피해 복구 과정에서 전해진 한국의 따뜻한 지원은 튀르키예 국민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다”고 인사했다. 양국이 서로를 괜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게 아닐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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