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며 각종 수탈과 강제동원 등 일제의 악행이 극에 달하던 1940년대 초반.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을 싣고 일본 군수공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한 청년이 갑자기 일어나 100명이 넘는 이들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조선독립운동의 전력이 있는 사람이오. 입소한 후에 모두를 위해 일하려고 하니 안심하고 뒤에서 오시오.”
독립운동 ‘전과’를 조선어로 당당히 밝히며 조선인 동료들을 안심시킨 그는 서울 도렴동 출신의 박용진(1923년 10월생)이었다. 일제 시대 ‘내지(內地)’로 불렸던 일본 땅은 조선인들에겐 죽음의 공간이었다. 불법적 강제동원령에 의해 징용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현지에서 목숨을 잃거나 병을 얻어 돌아오는 이가 태반이었다. 돈이 있어도, 집안이 좋아도, 그저 ‘사람이 덜 죽어나가는 곳’으로 뺄 수 있는 정도이지 징용 자체를 피하기는 힘들었다.

박용진이 만 21세 때인 1944년 10월 입소한 히로시마 미쓰비시조선소 군수공장도 악명 높은 징용지였다. 하지만 박용진은 이런 사지에 끌려가는 걸 또다른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았다.
일제 기록에 따르면 그는 “공장 내 조선인의 직종 결정시 희망을 반영해달라”거나 “우리는 식량이 부족해 휴업해야 한다”며 태업과 결근 투쟁 등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일본인 감독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어를 시시때때로 크게 외쳤는데, “내지인(일본인)과 우리를 차별하고 있다” “이곳은 감옥과 같다”는 말들이었다. 일제는 “선동적”이라고 기록해 놓은 그의 언행은 이국 땅에서 노역하는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어루만지고 사기를 북돋았다.
당연히 그는 일제에게는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였다. 특히 박용진은 불과 한 해 전 이미 독립운동으로 징역형까지 받았기에 이미 주요 감시 선상에 올라 있었다. 그는 1943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독립 운동)으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일제 내무부 산하 '조선인 치안유지법 위반자 검거조'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박용진은 중학교 재학 중 교사의 영향으로 “민족독립이 필연적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됐다.
특히 흥미로운 건 박용진의 입소 목적을 일제가 의심하는 대목이다. “위 자는 징용을 받았을 때 조선독립운동 전력이 발견돼 군 관리 공장에 취업을 저지시키려 하자 전향하고 있음을 강조…입소를 갈망해 결국 목적을 달성했다”는 부분이다.
일제 앞에서는 황국신민으로 거듭난 것처럼 위장한 뒤 징용 조선인들을 이끌며 적극적으로 불복종운동을 벌인 점으로 미뤄 박용진은 피할 수 없는 징용을 일제 군수생산의 심장부에 ‘잠입’할 기회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집행유예 기간 또다시 붙잡히면 중형을 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처해 사지로 뛰어드는 위험을 감수한 배경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실제 일제는 그에 대해 “300명 조선인과 함께 징용에 응하여 입소한 자인데, 동료 공원의 선두에 서서 신망을 얻고 있어 그 동향을 주의 중” “소위 지도자적 불순분자로 활약” “조선독립의 목적 달성에는 일본을 패전하게 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하여”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후 히로시마 공장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단체 조직을 도모하다가 1945년 2월 일제에 의해 검거됐다. 구속 재판 중인 같은해 8·15 해방을 맞았다.
박용진의 활동상은 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에 의해 지난해에야 확인됐다. TF팀이 발굴 자료로 활용한 일제 기록에 창씨개명한 이름 ‘송본용진(松本容鎭)’을 쓰는 인물이 수차례 등장한 게 단초가 됐다. TF팀은 송본용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본적지인 서울 종로구 도렴동을 바탕으로 제적 등본 등을 추적한 결과 박용진(朴容鎭)과 동일인물로 확인할 수 있었다.

日유치장 흙 벽에 "조선 독립 만세" 새기고 순국
징용에 끌려가서도 독립의 열망을 이어간 이들은 또 있다.
TF팀은 박용진에게 감화를 받아 미쓰비시 공장에서 비밀 독립 운동을 결의한 서울 태생 이천홍(당시 23세)도 찾아냈다. 이천홍은 당시 일본 도쿄추오대로 유학을 갈 정도의 엘리트였는데, 가정사로 인해 귀국했다가 1944년 10월 히로시마 미쓰비시 공장으로 끌려왔다.
이천홍은 박용진과 기숙사에서 만나 “일제의 패망이 머지 않았으니 조선 독립을 위한 행동을 준비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나 1945년 4월 6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 같은 해 6월 9일 유치장 내에서 자결 순국했다. 광복을 불과 두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일제의 기록상 그는 두 달 넘게 구금·취조 상태였는데, 모진 고문을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싸늘한 주검이 된 이천홍을 발견한 일본 간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해 상부에 보고했다.
“국본천홍(國本天弘, 이천홍의 일본식 이름)은 동숙 전력자인 송본용진(박용진)의 계몽을 받아 암약하고 있던 자인데 취조 중 자살 함…본 용의자는 유치장 내 흙 벽에 ‘조선 독립 만세’/미쓰비시 조선소 응징사/사상범(思想犯) 국본천홍’이라고 새겼음.”(일본 내무부『특고월보』)
그는 그토록 원했던 ‘조선 독립 만세’를 마지막 순간 유서처럼 남긴 셈이다. 그러나 일경은 그의 시신마저 가족이 아닌 미쓰비시 사측에 넘겼다. 패망을 앞둔 극한의 상황에서 사측이 ‘불온 사상범’이었던 이천홍의 시신을 고국에 온전히 돌려 보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셈이다.

“공장·광산 할 것 없이 단결하자” 독려…광복은 못 보고 순국
일본 규슈 사가현 소성탄광에서 독립 운동을 기도한 최재경(당시 35세)도 해방을 1년7개월 앞두고 옥중 순국했다. 그는 징용 전 조선에 있을 때부터 경북 ‘영천청년연맹’을 결성, 14세 미만 노동 금지 추진 등 조선인들의 권리 증진과 근대화 계몽에 힘 썼다.
최재경은 1942년 11월부터 일본 소성탄광에서 노역했다. 사측이 조선인들에겐 점심으로 찬 밥 한 덩이만 주는 등 차별을 일삼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했다.
일제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국은 최재경을 “의식이 첨예한 사상 요주의 인물”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일제가 적시한 최재경의 활동상에는 그가 탄광 내 조선인들에게 “내선(일본·조선)의 차별 대우는 결국 조선 독립에 의해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므로 내지(일본) 재주 전 반도인(조선인)은 공장·광산 할 것 없이 단결해 실력으로 봉기해야 한다”고 독려한 것으로 나온다.
최재경은 결국 1943년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이듬해 1월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일제는 그의 사인을 ‘위궤양’으로 기록했으나, 석 달 구금 기간 중 고문에 의해 몸이 쇠약해진 영향이 컸을 수 있다.
특별취재팀=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