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식을 앞둔 2015년의 어느 날. 양주연 감독(37)은 술에 취한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너희 고모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고모처럼 되지 마라.”
양 감독이 태어나기 전 ‘고모’가 존재했음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리곤 끝이었다. 아버지도 양 감독도 그 얘기를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던 시기, 그는 “(고모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양 감독이 카메라를 들기로 마음먹은 건 그로부터 3년 후다. 20대 초반까지의 생을 살았으나 가족에게조차 언급되지 못하고 잊힌 고모가 자꾸 생각났다. 2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양양>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양 감독이 고모의 흔적을 찾아다닌 7년의 기록이다.

53년생 양지영은 ‘왜’ 세상을 떠났나.
불편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앉은 양 감독의 아버지가 자신보다 네 살 많던 누나에 대해 기억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공부를 잘해서 광주서 제일 좋은 전남여고에 다니던 것. 밤마다 책 펴고 공부하던 것. 그러나 “여자는 안 된다”는 아버지(양 감독의 할아버지)의 반대에 서울로 대학을 가지 못하게 되자 방에서 울던 것. 조선대에 다니던 누나가 별안간 죽었다는 연락에 응급실로 택시 타고 뛰어갔던 것들. 죽음의 사유까지 추측하기는 어려운 기억들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양 감독은 고모의 친구들을 수소문한다.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이들에게선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온다. 고모가 헤어지려고 했다던 ‘남자 친구’의 존재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고모의 이름이 지운 듯 사라진 건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탐문이 이어진다.

<양양>은 아주 내밀한 가족사를 탐구하고, ‘잊히고 말았던 그 시대 여성’들을 호명하는 데까지 용기 있게 나아간다.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지난 19일 만난 양 감독은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오랜 고민 끝에 털어놓은 고모 이야기에 돌아온 반응은 뜻밖에도 “어, 우리 집에도 그런 가족이 있었는데”라는 말들이었다.
“‘너네 가족만 유별나다’는 반응이었다면 (다큐멘터리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집집마다 공부를 잘했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존재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삶이 비극적으로 흘러갔던 ‘누군가’들이 있었더라고요. 그 존재들이 각자의 집에 존재하는 비운의 이야기로만 남는 건 억울하고 아쉬운 일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양 감독이 가족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에 담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광주 전남도청과 양동시장 사이에 있는 외갓집 옥상에서 우연히 총탄 자국을 발견한 그는 할머니의 옛 기억을 인터뷰해 다큐멘터리 <옥상자국>(2015)을 만든 바 있다.

그런 그에게도 세상을 떠난 고모 얘기를 아버지에게 묻는 건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단편적인 사실관계만을 이야기하던 첫 인터뷰부터 차차 고모에 대한 내밀한 속마음을 듣기까지, 아버지의 마음을 여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은 부녀가 이전보다도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고모와 자신을 겹쳐보게 된 순간도 있었다. 양 감독을 보고 “느낌이 닮았다”고 되뇌던 고모의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영이도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카메라를 들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집안을 통틀어 예술 일을 하는 사람이 혼자라는 점에서 외롭기도 했던 양 감독은 그 말이 “반갑고도 슬펐다”고 한다. 시 쓰는 대학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미술도 잘했다던 고모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에서다.
사실 ‘양양’은 아버지에게 차마 고모의 이름을 묻지 못하던 시절, 양 감독이 혼자 지어봤던 이름이었다. 영화를 시작하며 ‘양지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그 삶이 감독이자 조카 양주연의 삶과 맞닿으면서 ‘양양’이라는 이름은 양씨 가문의 두 여자를 동시에 지칭하는 영화 제목이 됐다.

양 감독은 <양양>을 만든 지난 7년이 “금기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고모의 이름을 찾아가고 그 시간을 다시 되새기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고모처럼 드러나지 못했던 다른 여성들의 존재들이 조명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앞으로도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양 감독의 목표다. 최근에는 지난해 결성된 5·18 성폭력 피해 생존자 모임 ‘열매’ 구성원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는 “고모의 이야기가 쉽게 발화되지 못했던 것처럼, 5·18 당시 성폭력도 개인의 문제로 남아 있던 시간이 오래였다. 그 벽을 깨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분들의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