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당록(春塘錄)〉 : 여산 유생이 겪은 동학농민혁명
〈춘당록〉은 전라도 여산의 선비 양평(楊枰)의 남긴 문집이다.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들이 적지 않다. 저자의 내력은 문집 내용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분명하게 기재되지 않았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의 아버지 양재우(楊在佑)는 철저하게 이단을 배척한 전통적 유교지식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양평 자신도 유학자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동학과 서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글은 “갑오년에 읊다[甲午吟]”,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춘당록〉에 실린 이 글들은 체계적으로 수집되거나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실과 희귀한 문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주요 내용을 보면 “갑오년에 읊다[甲午吟]”에서 그는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점령당할 무렵, 여산 부사 유제관이 군사를 삼례에 보내 전주 외곽을 방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농민군이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사실과 전주성을 점령한 뒤 홍계훈과 공방전을 벌인 과정을 기록하였다. 또 신임 감사 김학진이 전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산에 머문 사실과 순변사 이원회가 파견된 일, 자신이 전주로 달려가서 장군봉에 올라 직접 전주 성내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그 감상을 적은 시를 남겼다.

그 다음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에서는 동학을 포함하여 이단을 설파하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어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에서는 1894년 8월 자신이 소모사 이건영의 종사관으로 임명된 사실을 기술하면서 이건영에게서 전달 받은 임금의 유지(諭旨)를 옮겨 놓았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소모사를 보낸 건 바로 도적의 무리를 보듬어 회유하여 그들로서 몽둥이를 만들어 섬나라 왜적들을 매질해 내쫓기 위함이고 소모사가 온 것 또한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도적의 무리를 교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여기에는 여산 부사 유제관도 이건영이 포섭했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다음에는 그가 소모사의 종사관으로 군사 모집을 위해 쓴 글인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를 실었다. 이 글은 소모사 이건영의 부탁을 받고 쓴 초안이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오랑캐’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겪은 사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등이 개화파와 음모를 꾸며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1894년에는 경복궁을 강점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또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3적의 행패를 지적하고 개화 정권의 수립을 비판하였다. 철저하게 일본 침략 세력과 이에 동조한 개화파를 매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1894년 8월에 호남의 여러 고을에 보낸 통문인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여산향교에서 작성해 호남의 모든 향교에 보낸 것이다. 이 통문에서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을 끌어들이려는 이건영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소모사 이건영이 동학농민군과 연합작전을 모색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의산유고(義山遺稿)〉 : 동학농민군 진압 선봉에 섰다가 의병을 창의한 인물의 기록
〈의산유고〉는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이 남긴 문집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을미‧병신의병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문석봉은 1894년 양호소모사로 임명되어 진잠, 금산, 고산, 회덕 일대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 이듬해인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가장 먼저 을미의병을 창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석봉은 경상도 현풍군의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무과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40이 넘은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곧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충청도 진잠 현감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가 되어 충청도 연산, 고산, 진잠, 회덕 일대의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의산유고〉에는 소모사로 임명된 다음 관찰사와 도순무영(都巡撫營)에게 올린 글들이 실려 있다. 특히 문집의 권1에 실린 〈토비략기(討匪略記)〉에는 공주 우금티 전투 이후 퇴각하여 곳곳에 둔취해 있던 연산 고산 완주 금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의 최후 전투로 알려진 대둔산 정상 남서쪽 형제바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실린 내용이 알려져 있었으나, 〈의산유고〉는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둔산 전투는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전투로도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린 아이와 임신한 여성 등 가족까지 데리고 피신한 농민군과 그 가족에 대한 일방적 학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기록된 이들의 최후는 매우 참혹하기 짝이 없다.
고산 완주 일대의 동학농민군과 그의 가족들은 대둔산 정상 남서쪽의 형제바위(720m)에 초막 3개동을 구축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진지가 함락되는 이듬해 1월 24일(음력)까지 이곳에서 피신해 있었다. 일본군 3개 분대와 조선 관군 30명으로 된 특공대(모두 60명)가 이들에 대한 대대적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은 1895년 1월 24일(음력) 새벽 5시였다. 이들은 세 방면으로 나누어서 사다리 등 장비를 이용해 형제 바위로 진격하며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완연한 화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9시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지만, 결국 어린 소년 1명만 남고 25명이 전사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피신해 있던 농민군 가족 가운데는 28~2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일본군과 관군이 난사한 총알에 맞아 죽었다. 또 접주 김석순은 한살쯤 되는 핏덩이 어린 딸을 안고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즉사하였다. 그 참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이런 참상을 뒤로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퇴각하였다.

의산유고에는 거짓으로 귀화한다고 한 김공진을 이용하여 대둔산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사이를 이간질하여 내분을 일으킨 다음 일본군과 함께 공격하여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다. 고산, 진잠, 금산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 최공우에 대해서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고, 전사한 농민군 명단 가운데도 최공우의 이름이 없다. 그러나 〈의산유고〉에는 최공우가 대둔산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도중에 피신하여 고산 염정동으로 피신한 후 거기서 다시 농민군을 규합하여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한 사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의산유고〉 등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현장이 확인되지 않다가 1999년 원광대 사학과에서 현장을 발견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1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최후의 항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