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일보 】 "그 어떤 시기라 해도 직까지 걸 수 있는 용감한 판검사 다섯 명만 있으면 된다",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고 죄 없는 사람 살리는 게 정의이다", "김재규의 내란목적 살인에서 '내란'은 빼야... 재심 통해 역사적 사실관계 바로잡아야"
대한민국 1세대 인권변호사이자 10·26사건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 개인의 파란만장한 삶과 혜안 넘치는 사상 및 철학을 강 변호사가 직접 육성으로 요약정리한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홍윤오 지음, 새빛 펴냄)가 그의 사후 3년 반만인 1월 출간됐다.
이 책은 고인의 사위이자 오랫동안 일간지 기자로 일해왔던 홍윤오 씨가 생전에 강신옥 변호사로부터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과 지난 2015년~2016년에 걸쳐 진행한 강 변호사와의 인터뷰 및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서술했다.
이 책에 의하면 강신옥 변호사는 평소 유신체제에 관해 언급할 때면 "권위주의 정권 시기라 해도 정의와 양심을 위해 기꺼이 직이라도 걸 수 있는 판사와 검사 5명만 있었다면 수백~수천 명의 억울한 시민들과 무고한 학생들 피해와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는 "정의란 죄 없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지 않고, 죄지은 사람에게는 성역 없이 벌을 주는 것"이라면서 "정의와 불의를 가리는 일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도, 좌파와 우파의 차이도 없다"고 역설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유신 시대의 대표적 인권탄압 사건인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서 "법이 정치의 시녀, 권력의 시녀가 되면 법을 빙자한 사법살인 같은 일이 벌어진다"라면서 "악법과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 생명체의 자연스런 본능이자 전인격적인 판단과 양심의 발로"라는 말로 자연법으로서의 저항권을 강조했다.
◆ 대의를 위해 개인적 소의를 희생한 김재규 재평가해야
강신옥 변호사는 10·26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동기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은 '각하는 갈수록 애국심보다 집권욕이 강해졌다'는 진단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김재규와는 일면식도 없었다가 10·26 사건 재판을 계기로 알게 됐다"고 술회하면서, "그와 5개월여 일대일 접견을 해본 결과 그가 진정 인권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 소의를 희생한 의인이라고 생각했다"고 김재규를 재평가했다.
그는 접견 때 김재규가 대만의 오봉이라는 식인종 스승이 변장한 채 스스로 제자들에게 먹혀 죽음으로써 식인 습성을 없앤 사례를 들며 "내 행위도 그와 비슷해 내 생명을 바쳐서 자유를 회복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전두환이 잔재주를 부리면 국민이 희생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파리에서 청부 살해당했으며 그 배후에 김재규가 있다는 취지의 참여정부 시절 국회 조사위원회 중간 조사결과 발표와 관련하여 강 전 변호사는 "한마디로 오해와 억측이고 미완의 조사결과다"라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김재규와 일대일 접견 때 몇 번이고 확인해 봤는데 본인이 극구 부인했다"라고 지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에서도 별 언급이 없었고, 더욱이 김재규 본인처럼 유신에 반대한 김형욱을 김재규가 주도해 제거했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증언했다.
◆ 10·26사건이 있었기에 YS와 DJ가 차례로 집권해
강 변호사는 "역사적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라도 김재규의 목숨만은 일단 살려놨어야 한다"라고 아쉬워하면서 "사실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이 대권 고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다 김재규 덕인만큼 나는 그 두 사람이 사나이답게 김재규에게 고맙다고 하고 구명운동에 나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 변호사는 "민간인 김재규가 일반 법원이 아닌 계엄 군법회의에서 재판받은 점, 정당한 방어권 기회를 박탈당한 점, 신군부에 의한 쪽지 재판 등 그동안 재심 사유가 많이 보강이 됐다"면서 "하루빨리 재심을 통해 '내란목적 살인' 죄목 중 '내란목적'만큼은 빼는 것이 역사적·사법적 책무이자 김재규의 명예를 최소한이나마 회복시켜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이 밖에 10.26사건 수사 과정에서 전두환 전 합동수사본부장이 김재규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각하를 시해했다면 왜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았나"라고 다그친 데 대해 김재규는 "혁명을 결행한 마당에 쓰레기들이 더 남아 있어서 그걸 다 치우고 총을 주면 자결하겠다"고 반박했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국회의 적잖은 특별법 제정과 관련해 강 전 변호사는 1988년 국회의 양심수 석방 특별법 제정 사례를 들며 "국민이 볼 때 속 시원한 정치적 의지의 표현일 수 있지만 이런 특별 입법은 대통령 사면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여지가 있다"면서 "국회는 양심수 석방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그 뜻을 존중해 사면권을 발동하는 게 최선"이라고 언급해 국회의 특별법 남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정치인 강신옥의 여정, YS와 DJ와의 인연, 정주영과 정몽준, 박근혜와의 일화, 신영복 사건 변호 등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 민청학련 사건 변호하다가 현직 변호사로 체포·구속돼
1936년 경북 영주시에서 태어난 강신옥 변호사는 서울대에 재학 중 고등고시 행정과(10회)·사법과(11회)에 합격해 1962년부터 서울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으나, 1년 뒤 법복을 벗고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1967년 변호사로 개업한 후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등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면서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제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강 변호사는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유인태 전 민주당 의원 등 관련자들의 결심 공판에서 "애국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등으로 걸어 빨갱이로 몰아 사형을 구형하고 있으니 이는 사법살인 행위다. 악법에는 저항할 수 있다"는 최후 변론을 하다가 법정모욕죄 등 혐의로 체포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대통령 특별조치로 석방되기까지 영어의 몸이 되었던 그는 한참 뒤인 1987년에야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85세 때인 2021년 7월 3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다음 단계를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열어갈 것인지 우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다는 데 있다.
【 청년일보=조성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