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호씨(47)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아버지 전종현씨를 잃었다. 2015년부터 세월호 일반인유가족협의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진실을 찾는 일을 해오고 있다.
“업무 때문에 당진으로 내려가다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아버지께서 제주도 가면서 탄 배가 섰다고 하시더라고요. ‘쿵’ 소리가 나면서 배가 섰는데 구조하러 온다고 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대요. 걱정되니까 회사 일정 빼고 진도로 내려가면서 여기저기 연락을 했더니 서망항으로 가라는 거예요. 11시쯤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시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니 팽목항으로 가라고 해요. 서둘러 갔더니 진짜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때 페리호가 한 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안 계셨어요. 누군가가 다음 배가 또 들어올 거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한참 동안 다음 배를 기다렸는데, 배가 안 왔어요. 또다시 여기저기 물어보니 더 이상 들어올 배가 없다고 해요. 제가 아버지를 못 봤을 수도 있어서 오후 5시쯤 진도 체육관에 갔는데 생존자 리스트에 아버지가 없었어요.
사고 이틀 뒤인 4월18일 세월호와 900m 떨어진 지점에서 아버지를 수습했어요. 사고 당시 71세셨어요. 정년퇴직하시고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셨는데 자전거 국토대장정 하시면서 4대강 찍고, 맨 마지막 코스인 올레길 코스 타려고 동호회 분들이랑 제주도에 가시던 길이었어요. 올레길까지 타면 그랜드슬램이거든요. 낚시, 골프, 자전거 등등 제가 아버지랑 취미가 비슷해서 꼭 친구처럼 친했어요. 누님이 미국에 살다 보니 10여 년 동안 미국을 자주 오가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느낌보다는 미국 누님 댁에 가신 것 같아요. 언제 갑자기 전화해서 ‘애비 언제 들어가니까 시간 맞춰서 공항으로 나와라’ 하실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로 사회적으로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많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옛날에는 형식적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부분을 규정대로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고가 난 뒤에 무엇을 바꾸려 하는 것보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봐요. 후속 조치의 개념보다는 인권을 바탕으로 한 법안들이 마련되었으면 해요. 미국 등 선진국의 법안이 우리와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어요.
지난 10년 동안 진상규명을 위해 한국 사회가 많이 노력했는데요, 세월호가 침몰한 명확한 진상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정치 이슈로 비친 점이 안타까웠어요. 진상규명 과정에서 정부가 내놓은 데이터값이 명확하지 않았던 부분, 절댓값이 없다 보니 그 누구도 100%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별의별 얘기가 다 나오고 정치의 도구로 변질된 것 같아 많이 속상했어요.
세월호가 10년이 지났고, 이태원 사고도 1년이 넘어갔네요. 안전 사회 구현에 대해 많이들 말하는데 개선된 부분이 있지만 부족한 부분도 상당히 많아요. 헌법에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국민은 납세·국방 등의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잖아요. 세금을 조금 늦게 내면 추징금까지 붙여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해놓고는 국민의 생명이 위험할 때 국가는 뭘 했나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사회의 모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세월호 참사를 ‘사건’으로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냉철하게 생각할 수 있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명예를 실추시키는 발언을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