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의 기원과 울산 어린이날 행사
어린이날은 1922년 방정환을 제안으로 천도교소년회가 선포한 것이 첫걸음이었다. 다음 해 1923년에 천도교소년회가 주도해 전국소년운동협회를 창립하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한 뒤 기념행사를 열었다. 소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각 지역에서 다양한 주최와 형식으로 개최하게 된다. 1924년 어린이날 행사가 전국에서 메이데이(노동절) 행사와 겹쳐 큰 성황을 이루자 일제 경찰이 행진을 금지하는 등 방해를 시작했다.
울산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는 1924년 5월 1일 언양에서 여러 소년단체가 연합해 기념행사를 하고 행진했다는 신문보도가 처음 확인된다. 1925년 어린이날 행사는 병영 학성보통학교에서 기념가를 부르고 행진했고, 언양도 소년소녀들이 긴 행렬로 마을을 돌고 선전물을 배포하며 주민들의 환호 속에 성황을 이뤘다.
1925년 7월 15일, 울산성우회 주최로 ‘어린이’운동의 제창자며 잡지 <어린이>의 발행주간인 방정환을 초청해 울산보통학교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날 강연 제목은 “신생(新生)의 도(道)”였다. 방정환은 같은 날 열린 “전울산현상소년소녀동요동화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았고, 이후 언양 청년단체 회원들의 초청을 받아 하루를 쉬어 갔다. 방정환과 울산의 만남은 이후 소년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1926년 어린이날은 순종이 4월 25일에 승하한 후 6월 10일 국장(인산)까지 추모가 이어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연기된다. 3.1 만세운동에 이어 6.10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 경찰 통제가 더해져 취소되거나 금지됐다.
울산은 국상에 슬퍼하며 곡을 하는 ‘망곡’과 여러 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진행됐다. 그 중 울산보통학교와 학성보통학교는 학생들이 일시 휴교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동면보통학교도 5월 4일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망곡을 하고 일주일간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때 동면의 상점들도 문을 닫는 철시로 동참했다. 1927년에 다시 열린 어린이날은 경찰의 통제로 행진은 중단되고 실내 행사로 대체되면서 반발이 일어났다.
1928년이 되면 울산의 어린이날 행사가 조금 더 특별해진다. 울산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이 총망라한 신간회 울산지회가 결성되면서 소년소녀단체들이 연합해 어린이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1929년에는 소년운동 통합단체인 울산소년동맹 설치대회를 5월 9일로 잡고, 신간회를 비롯해 12개 사회단체가 힘을 모아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했다.

적호소년회, 어린이날 행사 연이어 금지당해
보성학교 폐쇄 소동 속에 교사들이 퇴진하면서 동면 지역 운동진영은 큰 혼란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적호소년회는 굴하지 않고 활발하게 조직을 운영했다. 신간회 울산지회 설치 이후 청년동맹에 이어서 1928년 3월에 결성된 ‘조선소년총연맹’의 지역조직인 울산소년동맹을 설치하는 과정에 적극 동참했다.
서울에서는 1927년까지 3년 동안 소년운동단체가 전국소년운동협의회와 오월회로 나뉘어 두 개의 행사가 개최되어 오다가 1928년 5월 6일 어린이날 행사가 단일 행사로 진행됐다. 조선소년총연맹은 7월부터 도 연맹 설치에 착수했다. 1929년 5월 5일, 서울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는 더욱 성대한 규모로 진행됐다. 조선소년영화제작소는 부대행사까지 모두 촬영해 영화로 완성한 뒤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이틀 동안 공개했다.
적호소년회도 일제 경찰의 방해를 대중의 힘으로 풀겠다는 마음으로 1929년 ‘어린이날’ 행사를 동면 전체가 들썩일 수 있도록 큰 규모로 준비했다. 하지만 방어진 주재소는 행사 개최 하루 전인 4일에 금지 통보를 했다.
울산읍 어린이날 행사도 같은 날 금지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축하등과 축하 깃발을 장만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허사가 된 것이다. 언양 어린이날 행사 역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에서 울산경찰서의 금지 통보를 받아 공분이 일었다.
적호소년회는 1930년 5월 4일, 어린이날 행사 역시 금지 당했다. 이번에는 동면만 금지돼 더 큰 실망과 분노를 자아냈다. 울산읍, 언양, 병영은 모두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지만 동면만 경찰이 2년 연속으로 금지명령을 내린 것이다.
적호소년회는 모든 준비를 마친 후 5월 3일, 주재소에 행사 계획을 제출했지만 허사가 됐다. 집행부는 행사 금지에 대한 항의 표시로 애써 준비한 ‘비라’(선전물)라도 뿌리겠다며 자동차를 대절했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져 그마저 진행되지 못하자 낙심이 컸다는 신문보도가 있다.
어린이날 행사가 금지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한 지역만 골라서 연이어 금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동면 어린이날 행사와 적호소년회가 준비한 행사만 매년 금지한 것은 일제 경찰이 크게 경계했다는 것밖에 달리 이유가 없다. 동면이 울산의 다른 곳보다 사회주의운동이 강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자 비중이 높아 행진이 동한 행사를 원천 봉쇄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소년동맹 설치 금지, 울산청년동맹 설치는 성사?
일제 경찰은 1929년 5월 5일 동면, 병영, 울산읍에서 각각 준비했던 어린이날 행사를 모두 금지한 것에 이어 4일 뒤로 예정됐던 울산소년동맹 설치대회도 막아버렸다. 그런데 금지 통보를 한 일제 경찰이 내놓은 이유가 황당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정 12년(1923년) 당국이 절대로 소년단체의 집회를 금지하는 지령을 소화 2년(1927년)부터 실시”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 답변은 궤변에 가까웠다. 6년이 지난 지령을 근거로 단체 결성을 막는 것도 말이 안 됐고, 그 기간에 전국에서 이미 수많은 소년단체가 창립했기 때문이다.
소년동맹만 따지고 봐도 ‘조선소년총연맹’ 산하 도연맹으로 ‘경남소년도연맹’이 울산에서 설치대회를 열기 10개월 전인 1928년 7월 8일에 설치된 상태였다. 게다가 다른 도 연맹도 모두 설치를 마쳤기 때문에 울산에서 금지하는 것은 명분이 없었다.
이렇게 울산소년동맹 설치가 무산된 상황에서 한 달이 안 돼 1929년 6월 2일, 울산청년동맹 창립대회가 울산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 창립대회도 고난의 시간을 견딘 것이었다. 1927년 12월 첫 번째 시도 금지 후 6개월 뒤 1928년 5월, 2차로 창립대회가 열려 막바지 결의문만 남긴 상태에서 경찰이 급습해 다시 중단된 후 1년이 걸렸다.
더구나 2차 결성 시도 때 울산 사회운동을 이끌어 온 조형진(1895~?), 강철(1897~?), 권우락(1900~?)을 차례로 체포했다. 5월 18일 창립대회를 강제 해산한 후 일제 경찰은 수차례 소환조사 후 7월 20일,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을 걸어 구금했다. 창립대회 결의문이 매우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 뒤로 부산 검사국에 송국됐고 7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한 뒤 1929년 2월, ‘울산청맹사건’의 예심을 개시했다. 이때도 예심판사가 울산에 출장와 청년동맹 준비위원 등을 신문하고 가택수색·압수를 진행하며 공포 분위기를 일으켰다. 예심 종결 후 4월 16일에 첫 공판이 열렸지만 방청이 금지된 채 진행됐다. 5월 9일 조형진과 강철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권우락에게 징역 1년 6개월·3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권우락은 선고공판이 끝나고 3일 뒤 5월 12일에 석방됐다.
조형진과 강철은 항소했다. 복심재판부는 치안유지법을 무죄로 선고하고, 출판법 위반만 벌금 50원을 선고했다. 최종 석방된 날이 1929년 11월 18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벌금에 불과한 사건을 16개월이나 감옥에 격리시켜놨으니 일제 경찰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울산청년동맹 설치만 그 시간 동안 늦어진 것이다.
오월청년동맹은 1929년 3월 24일, 정기총회에서 ‘울산청년동맹 조직 촉성의 건’을 통과시키며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동면 번덕리(일산상리), 일산리, 화정리에 차례대로 반(班)조직을 설치했다. 반장은 선배 세대인 박학규, 장병준, 이인석이 맡았고 간사는 적호소년회를 거쳐 올라온 박학조, 찬덕고(이상 번덕), 김영복, 서진숙(이상 일산), 김두선, 장두석(이상 화정)에게 맡겼다.
이런 준비를 거쳐 오월청년동맹은 5월 19일 울산청년회관에서 열린 울산청년단체 대표자 간담회에 성세륭이 참가해 청년동맹창립대회를 재추진한다. 청년동맹 창립 후 딱 2주일 뒤인 1929년 6월 16일, 보성학교에서 임시대회를 열어 바로 조직 전환을 결의하고 울산청년동맹 동면지부 설치대회를 열어 임원을 재편했다.

표의 명단에 보면 성세빈, 장인두 등 선배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성세륭, 박학규, 장병준, 천호문이 핵심 임원으로 중심을 잡았고, 소년운동을 거쳐 온 신입 박학조, 천덕고, 장두석, 김재곤 등이 활약하는 그림을 그렸다. 오월청년동맹을 정식 해산하는 자리는 따로 열렸는데 9월 19일 보성학교에서 ‘해체식’을 진행했다. 사회는 장인두가 맡아 모인 이들과 함께 지나온 ‘15년’의 역사를 하나씩 반추하면서 비장한 감상을 표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15년은 소년회→동면구락부→오월청년동맹에 이르기까지의 분투한 시간이라고 보도했는데, 이 내용대로 역산해보면 1915년부터 동면에서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이 싹을 틔웠다는 뜻이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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