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한때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프랑스 사상가이자 소설가였다. 세 살 어린 페미니스트 여성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와의 파격적인 계약 결혼, 인간의 본질을 좇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 맞선 레지스탕스 운동 참여, 그리고 1964년 작가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의 과감한 거절…. 사르트르의 삶은 우리가 ‘지식인’ 하면 떠올리는 창의력부터 자유분방함까지 모든 요소를 갖춘 듯하다. 오늘날 사르트르의 저술을 읽어본 이는 적어도 그의 대표작 제목인 ‘구토’(1938)나 ‘존재와 무’(1943)를 기억하는 이는 많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존재감이 한국 지성계에서 희미해진 것은 젊은 시절 그의 공산주의 심취와 무관치 않다. 마르크스 사상에 푹 빠진 사르트르는 소련(현 러시아)에 찬사를 바쳤다.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사르트르는 소련 공산당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북침’을 주장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우파·반공 철학자인 레이몽 아롱(1905∼1983)은 사르트르가 정치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겼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언론 기고문에서 “북한의 남한 침략은 2차대전 종전 후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주장한 아롱은 결국 사르트르와 결별한다. 당대 프랑스 최고 지식인들이 한국 때문에 갈라섰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25 전쟁 당시 프랑스는 한국에 연인원 3420여명의 장병을 보내 그중 269명이 전사했다. 파병 규모로만 따지면 같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178만여명), 영국(8만1000여명)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은 물론 그리스(1만200여명)나 네덜란드(5300여명)보다도 적다. 이는 당시 프랑스가 알제리, 베트남 등 옛 식민지에서 독립군과 전쟁을 치르느라 극심한 병력 부족을 겪었던 탓이다. 그런데 참전 인원 대비 전사자 비율을 놓고 보면 100명 중 7∼8명꼴로 목숨을 잃은 셈이니 너무도 참혹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2023년 당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6·25 전쟁 도중 프랑스군과 중공군 간의 격전지였던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프랑스는 6·25 전쟁 유엔 참전국 중 참전 인원 대비 인명 피해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라며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다”고 경의를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사브리나 세바이히 등 프랑스 하원의원 4명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 백승주 회장이 “한국인들은 프랑스군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고 인사하자, 세바이히 의원 등은 “프랑스는 평화가 필요한 순간 언제든 한국의 곁을 지킬 것”이라고 화답했다. 말만 들어도 반갑고 또 든든하다. 마침 올해는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이자 프랑스군의 6·25 전쟁 참전 75주년이다. 격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양국의 우정이 오래도록 단단하게 유지되길 고대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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