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속한 사람들

2025-08-15

지난해 6월 독일 함부르크지방법원은 95세 우르줄라 하퍼베크에게 국민선동죄로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했다. 하퍼베크는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에 대해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등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발언을 해 기소됐다. 2004년부터 같은 죄목으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던 그는 지난해 11월 사망했다. 하퍼베크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극우 세력이 집결해 마지막까지 나치의 명예회복을 위해 살다 간 동지를 기렸다.

박근혜 정부 초기 집권 세력은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미화한 내용을 담은 ‘올바른 역사교과서’ 도입을 추진했다. 보수 진영에 불리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발상으로 제작돼 친일·독재를 미화한 이 교과서는 전국에서 단 1개 학교에서만 채택되는 데 그쳤다.

역사의 재검토는 새로운 증거가 드러났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역사수정주의는 대개 진실과 무관하게 자신이 속한 세계를 곤경에서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지난주 이재명 대통령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를 포함한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자를 확정했다. 이 사면은 일종의 역사수정주의의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조 전 장관의 사면을 요구한 이들 대부분은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조 전 장관의 입장을 옹호했던 사람들이다. 이후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이 났고 입시비리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주장했던 하퍼베크처럼 이들은 표창장 위조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조국의 복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국의 복권이 아니라 한 변변치 못한 인간을 옹호했던 본인들 마음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왜 하퍼베크 할머니는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히틀러를 변호해야만 했을까. 그가 여전히 나치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1928년생 하퍼베크의 자아는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나치의 명예와 동기화됐고, 죽을 때까지 그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조국의 복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그들 일가가 가엾다고 말한다. 하나도 올바르지 않았던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처럼. 이승만·박정희가 아니라 역사가 잘못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처럼. 조국이 아니라 검찰이, 판사가, 언론이 잘못했다고 말한다. 사실 저들은 조국의 복권이 아니라 한 변변치 못한 인간을 옹호했던 본인들 마음의 복권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박근혜가 가여워서가 아니라, 조국이 가여서워서 아니라 그런 게 옳다고 믿었던 자기들 마음을 가엾게 여기는 애틋함이 아닌가.

하퍼베크의 인생이 주는 교훈은 사람은 과거의 오류에 속하지 않을 때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지금의 내가 나치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 위안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일제의 군국주의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 조국 사태의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더 이상 조국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 생의 어떤 시점에 고정된 ‘나’가 인생의 전체 경로를 지배한다면 인생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