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제5도살장>은 커트 보니것의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 병사로 참가한 주인공 빌리 필그램이 독일군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는 이야기이다. 1969년 발표된 반전 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는 반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설은 평범하고 좀 부족한 주인공을 통해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와 고통을 이야기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내란 사태에서 겪는 고통과 닮았다. 인간은 비인격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인간의 영혼이 파괴되고, 대부분 회복되지 못하고 깊은 상흔이 남아 고통을 겪는다. 주인공 빌리 필그램은 전쟁 중에 자신을 살려 준 동료 롤런드 위어리의 죽음을 보게 된다. 전쟁 상황에서도 활기차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만큼 유능하지만 우연한 사고가 원인이 되어 포로수송열차 안에서 죽고 만다. 또한 누구보다도 몸을 잘 관리하고 희생적인 고등학교 교사 출신 에드거 더비도 전쟁이 끝난 뒤 찻주전자를 훔친 죄로 총살을 당해 죽고 만다. 수많은 사람이 능력과 상관없는 이유로 죽게 된다. 객관적인 기준과 판단은 의미가 없이 우연의 점철로 가장 허약한 주인공이 살아남게 된다.
이후 주인공은 종종 트랄파마도어 행성 외계인에게 납치된다.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인식을 가진 외계인과 대화를 나누고, 외계 행성의 동물원에 전시된다. 트랄파마도어인은 ‘모든 일은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고, 서스팬스도 없고, 교훈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고’,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바다’라고 말한다. 빌리가 전쟁에서 겪은 죽음과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를 보면 마치 전생과 미래를 한눈에 보는 외계인을 만난 듯 충격받는다. 김건희 특검 포토라인에서 한 말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이다. 마치 자신 같이 하찮은 사람이 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모든 국민이 이렇게 수선을 떨 일이냐는 말처럼 들린다. 그것도 표정도 없이 태연한 자세였고, 조사받는 시간도 지키지 않았다. 경력을 부풀렸을 때 한 사과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경력을 부풀렸다고 했다. 경력을 조금 좋게 한 것을 가지고 너그럽지 못하고 야박하게 대할 필요가 있냐는 말처럼 들렸다. 그 말 역시 도덕성도 시간도 결과도 배제한 말이다.
윤석열이 법을 사적인 칼로 휘두르며 만들어냈던 일들은 전쟁처럼 인격을 파괴하고 영혼에 상흔을 남기는 일들이었다. 지구인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라고 느껴졌다. 법의 포로가 된 사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원인도 없고, 교훈도 없이 동물원에 전시된 것처럼 발가벗겨져 생중계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평시에 정직과 규칙, 그리고 윤리와 공정성이 무너지고 무의미해짐을 느꼈다. 이러다가 타인을 제물로 삼고 함부로 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무감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다.
복수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금은 우리의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일상의 규칙과 가치관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잘못된 일을 드러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자신의 부의 축적 자유를 위해 고속도로를 구부리고 주식가격을 조작한 게 사실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아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로 치장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그쯤은 해도 되는 자유를 가져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죽이게 하고, ‘모든 일은 시작도 없고, 중간도 없고, 끝도 없고, 서스팬스도 없고, 교훈도 없고,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고’ 혼란의 세상으로 빠트릴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주인공 빌리는 전쟁이 끝나서 결혼하고 일상에서 부를 축적하고 자녀도 두었지만 여전히 외계인에게 납치당한다. 자다가 일어나면 정신병동의 침대였다가, 외계인의 비행기였다가, 전쟁 포로의 병실이었다가를 반복한다. 전쟁 포로수용소에 갇힐 때 죽은 병사에게서 벗겨낸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외투를 받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과 번호표를 받게 된다. 그 이전에는 죽어도 기록이 안 되지만 드디어 죽음이 기록될 자가 된 것이다. 삶의 아이러니, 죽음의 순간마다 ‘그런 거지 머’라는 말을 하는 빌리.
제5도살장 같은 기록들이 살아남아서 미래를 구하는 기준이 될 거라고 믿고 싶다.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탐욕의 전쟁을 멈추도록, 범죄 사실을 밝히고 드러내어 처벌받도록 모두 힘을 내야 한다.
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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