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 죽지는 않을 테니

2025-08-12

내 삶의 균형이 무너져 힘들고 외로울 때 외면하지 않고 돌보아주는 사람, 내가 좌절하며 더 이상 꿈도 희망도 없다고 포기할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사람, 매사 뜻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마음 편히 먹으라고, 다 지나갈 거라고 위로해 주는 사람, 그는 누구인가. 뱃속부터 벗이요,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다.

최근 눈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담당 의사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보통은 이렇게 시력이 없으면 눈동자가 제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은데, 무슨 조화인지 스님이 의지가 강해서인지, 놀랍게도 잘 버티고 있다고 말이다. 순간 속으로 잔잔한 웃음과 함께 소리 없는 독백이 흘러나왔다. ‘그런 거라면 아마도 의지가 강한 어머니를 닮은 덕분이겠죠.’

운명이나 업은 존재하지만

삶은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어

죽음은 결코 최후 선택지 아냐

운명도 닮는 걸까. 아니, 과연 운명이란 게 있기나 한 걸까. 고도로 발전된 현대 문명사회에서 운명이 있다고 말하면 운명론자라며 달갑지 않은 시선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운명을 닮는다니, 어찌 생각하면 나약함이 첨부된 불편한 말인 듯하다. 내가 어머니 팔자를 닮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외모나 성격을 닮은 부분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적 관점에서 보아도 정해진 운명이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쌓았던 과거의 행동(업·카르마)에 따라 결과는 언제든 때가 되면 나타나게 마련이니까. 다만 그 모습이 각자 업의 결에 따라 다를 뿐이다.

하지만 운명은 내 의지에 따라 바꿀 수도 있고, 개척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운명을 개척하지 못한 채, 나쁜 운명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나락으로 빠져들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무너질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만들어낸 기존의 운명과 새로 만나는 운명적 요소의 상호작용과 결합으로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다시 그 지점에서 또 다른 운명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적 가르침의 변형된 형태로 이해해 두면 좋을 듯하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부메랑의 원리와 같다. 부메랑은 처음 던졌던 위치로 되돌아온다. 전생에서 던졌던 업의 부메랑이 현생에서 운명의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주어진 삶의 마디마디를 일상의 부메랑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여름밤이 새벽을 건너 아침으로 당도하는 길이 길어서 그런지, 요즘 TV 방송에서는 ‘납량물’이라는 유사 제목의 타이틀을 달고, 망자의 의지를 알아차리고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샤머니즘의 신묘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색다른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뜻밖의 생각 거리를 안겨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운명은 남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용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살면서 생기는 고통과 어려움, 괴로움을 해결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결코 남이 해결해 줄 수 없다. 이게 우리 앞에 놓인 생(生)의 규칙이다.”(『헤세의 인생 공부』, 헤르만 헤세)

살아가면서 생기는 여러 모습의 고통과 곤란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쥔 자는 결국 바로 자신이며, 이는 곧 공통된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 섭리라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살 충동을 느꼈던 지난날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출가한 나에게 있어 죽음이란 주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출가 이전부터 죽을 생각을 자주 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상담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대부분은 자기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주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된 상담이었다. 그러나 나의 결론은 특별하지 않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잖아” “걱정 마, 당신은 죽지 않을 테니.” 짧은 이 한마디가 나의 대답이었고, 진심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런데 살면서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오직 행복만을 느끼며 사는 것이 정말 참된 행복일까? 나는 인생 초반을 죽음의 충동으로부터 가까스로 넘겼다. 도무지 내가 원하는 삶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시절이 길었다. 그나마 출가해서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제한된 삶의 테두리 안에 살면서도 어떤 조건에도 압도되지 않고 스스로 행동의 폭을 조절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야!’라는 태도로 세월의 파도를 타다 보니 혼란스럽던 마음도, 들떠 있던 마음도 차츰 자리를 잡고 평온해졌다.

죽음은 살아온 삶을 대변한다.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겠지만, 가볍게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선택지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아직 더 잘 살아내야 한다.

“걱정 마, 죽지 않을 테니.”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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