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폭력 사건을 두고 만난 양측 부모. 교양 있게 서로 간의 합의를 이끌던 부부는 적절한 거리를 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지난 3일부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는 연극 ‘대학살의 신’. 2019년 이후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려진 연극은 새로운 색채를 띤다.
노오란 튤립이 두 병의 꽃병에 꽂혀 화사함이 가득한 거실은 미셸과 베로니끄 부부의 공간이다. 양쪽 정당을 가르고 있는 영국 의사당의 풍경처럼 오른쪽 소파에는 미셸·베로니끄 부부 왼쪽에는 알랭·아네뜨 부부가 앉아 있다. 두 커플은 아이들의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 초반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90분간 이 공간을 채우는 것은 네 명의 어른들이다.
각자의 부부 사이에 지적 허영심을 대표하는 이들은 신동미 배우가 열연한 베로니크와 조영규 배우가 분한 알랭이다. 각각 작가와 변호사인 그들은 합의문을 둘러싸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말싸움을 펼친다. 교양을 가장하지만 체면 치레에도 한계가 있다. 임강희 배우가 맡은 아네뜨는 베로니끄가 너무도 아끼는 베이컨 화집에 토악질을 한다. 분노한 아네뜨가 맹공을 퍼붓는다. 베로니끄의 교양 있는 모습도 오래가지 못한다. 아네뜨의 구토는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허위와 이중성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베로니끄의 남편인 미셸은 언뜻 이들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이지만 잘난 부인에 대한 자격지심과 자신감 부족으로 인해 뚜렷한 입장을 내지 못하고 어릿광대가 되기를 자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5년만에 연극 무대에 선 김상경 배우는 신동미 배우와 찰떡 호흡을 선보인다. 신동미 배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극의 중심을 잡고 임강희 배우는 다양한 감정 표출로 이 극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모든 권위에 저항하던 아네트는 극 초반에 아름다움을 칭찬했던 튤립 수십 송이를 결국 바닥에 내려치며 강력한 균열을 낸다. 김태훈 연출은 “아이들 문제지만 당사자인 아이들이 등장하지도, 아이들의 의사가 반영되지도 않는다”며 “공연이 끝났을 때 인간으로서 우리를 돌아보고 헛헛한 웃음과 씁쓸한 미소를 갖고 극장을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