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내 이야기인데 낄 자리가 없다

2024-12-26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씨씨

권김현영 지음

위즈덤하우스 | 116쪽 | 1만3000원

지난여름 문학계는 일명 ‘정지돈 사태’로 시끄러웠다. 소설가 정지돈씨가 전 연인 김현지씨와의 일화를 당사자와 상의 없이 인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정 작가와 5년 전 헤어졌다는 김씨는 연애 당시 나눈 대화 내용 등이 정 작가의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 <브레이브 뉴 휴먼>에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 작가에게 무단 인용을 인정 및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정 작가는 일부 책의 판매 중지를 결정하면서도 무단 도용은 인정하지 않았다. 문학계 화두인 ‘재현의 윤리’는 이렇게 또 공론장으로 나오게 됐다.

이때 난데없이 함께 끌려나오게 된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권김현영이다. <브레이브 뉴 휴먼> 속 인물 ‘권정현지’가 권김현영과 자신의 이름을 합쳐 만든 것이며 김현지씨와 관련이 없다는 정 작가의 해명 때문이었다. 이후 정지돈과 김현지가 벌인 공방은 권김현영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들였다. 기사로, 소셜미디어 속 한마디 한마디로.

단편 소설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씨씨>는 이 사태에서 “피해자도 방관자도 목격자도 될 수 없었던” 권김현영이 보내는 흥미롭고도 문학적인 응답이다. ‘인식론적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면 결국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야 했다고 그는 말한다.

남들보다 높은 체온을 가진 ‘씨씨’가 주인공이다. 독특한 체질은 사람부터 동물까지 씨씨에게 달라붙게 만든다. 누군가는 씨씨의 특별함을 귀하게 여겼고 누군가는 함부로 다뤘다. 그런 씨씨 앞에 “너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D’가 나타난다. 씨씨는 친구 ‘권’과 대화를 통해 연인이 된 D에게서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파고들어간다.

사태에 대한 응답으로 탄생한 작품이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여성주의 문학이다. 날카로운 유머로 가득하다. 씨씨가 수신인도 발신인도 아닌 참조자(카본 카피)의 약자라는 점은 작가의 얄궂은 위치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이름·정체성 찾기’라는 여성의 보편적 여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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