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썰] 반미(反美)·반독(反督)적 전쟁과 죽음에 관하여, <제5도살장>

2025-03-21

책의 첫 머리말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전쟁 이야기는 아주 많은 부분이 사실이다.”의 진지한 ‘척하는 것’과 다르게 책은 줄곧 시니컬하고 위트가 넘치며 짓궂다. 모든 죽음에 “그런 거지 뭐”라고 말하고 예수를 모독하며 “자지”와 “섹스”와 “오줌”을 한통속으로 묶어버린다. 이 장르가 판타지인가 다큐멘터리인가 했다가 그저 그런 배설물인가 싶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책은 (정서적으로) 잔혹하다. 다만 위트로 위장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책 안의 책들이 빛난다. 보니것은 <특이한 대중적 망상과 군중 광기>(찰스 맥케이, 국내에는 <대중의 미망과 광기>(2018)로 출판)에서 “역사의 엄숙한 페이지에 기록된 것을 보면 십자군 병사들은 무지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에 불과했으며, 그들의 동기는 편협하기 짝이 없고, 그들의 길은 피와 눈물로 얼룩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망스는 그들의 신앙과 영웅주의를 길게 이야기하고, 매우 빛나는 정열적인 색조로 그들의 미덕과 아량, 그들이 얻어낸 불멸의 명예,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위대한 공헌을 그려낸다.”를 인용한다.

이 외에도 이 책과 어울리는 읽을 만한 책들이 많이 나온다. <드레스덴, 역사, 무대, 미술관>(메리 엔델), <바람에 실려온 말>(시어도어 레트키), <셀린과 그의 비전>, <외상 죽음>(이상 에리카 오스트롭스키), <슬로빅 이등병의 처형>(윌리엄 브래드퍼드 후이), <인형의 계곡>(재클린 수전), <붉은 무공훈장>(스티븐 크레인), <4차원의 미치광이들>, <우주에서 온 복음>(이상 킬고어 트라우트) 등이다.

트라우트의 책에서는 외계인들이 기독교인이 왜 그토록 잔인한지를 밝혀내고, 그들의 자비는 ‘연줄’이 있는 자들에게만 한정되며, 정신병이란 4차원에 존재하므로 3차원의 인간들은 절대 그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인용한다. 다만 작가는 기독교인을 적으로 돌렸을 때의 후환이 두려웠는지 전장(戰場)에서 병사의 입을 통해 트라우트가 아이디어만 그럴듯할 뿐 쓰레기 같은 글을 쓴다고 힐난한다.

작가는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의 페르소나인 극 중 주인공 ‘빌리’는 보니것을 대변해 전쟁의 참상으로 고통받는 중이고, 미국과 기독교와 전쟁을 힐난한다. “빌리는 변소 안을 보았다. 울부짖음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바지를 내린 미국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 빌리 옆의 한 미국인은 뇌만 빼고 전부 배설해 버렸다고 울부짖었다. … 그렇게 울부짖은 게 나였다. 바로 나. 이 책의 저자.”

수필도 아니고, 만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도 아니고, 저자는 소설 속의 한 등장인물로서, 포로수용소의 오줌통 안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소설이란 장르가 허구일 뿐 처절했던 전쟁의 참상이란 게 진짜였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등장은 영화 <펄프 픽션> (1994, 쿠엔틴 타란티노)에서 감독이 미치광이 가짜 의사로 짧게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서비스다.

그런데 이 장면은 빌리가 그녀의 ‘뚱뚱하고 못생긴 부인’과 첫날밤을 치르고 난 뒤에 이어지는 시간 여행이다. 이 장면에 이어 다시 부인과의 첫날밤 침대로 이어진다. 섹스를 소변보기와 같은 배설로 취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 배설을 통해 부인의 아버지로부터 대기업을 물려받게 되었으므로 그에게는 결혼과 섹스가 노동이다. 어쩌면 전쟁을 겪은 그에게 사랑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아름다운 감정들은 불가능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구성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 뼈대와 실핏줄까지 연결된 ‘시간 여행’이고, 영화를 보는 듯한 묘사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필름을 바로, 거꾸로 돌리는 듯한 장면들이다. 전쟁터에서 폭격기가 터지는 장면과 이를 거꾸로 돌리는 장면에서는 숨이 막힌다. 폐허가 됐던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면서 비행기가 총알과 포탄 파편들을 “빨아들이고”, 독일 전투기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새것처럼” 만든다. 이어서 공장에서 만드는 무기는 광물로 분리되고, 그 광물은 땅으로 다시 들어가 지구의 어떤 것에도 위해를 입히지 않는 상태가 된다. 무기가 무기 이전의 것으로 분해되어 자연이 되는 것이다.

실제 전쟁의 참상을 겪고 전쟁 포로로서 존엄성을 짓밟혔던 보니것은 전쟁을 묘사하는 영화라는 매체도 비판한다. “틀림없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던 척할 거예요. 영화라면 … 매력적이고 전쟁을 사랑하는 추잡한 늙은 남자들이 두 사람을 연기하겠죠. 그럼, 전쟁은 그냥 멋지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또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전쟁에 … 어린아이들이 나가 싸우게 되겠죠.” 영화의 선정성을 이토록 신랄하게 비판한다.

보니것은 <타이탄의 세이렌>(1959)의 공간적 배경인 트랄파마도어를 이 책에서도 소환하고 있다. 전쟁에서 돌아와 폐허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 빌리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꾸준히 트랄파마도어를 드나드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빌리의 착각이자 환상이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과 시간을 넘나드는, 다시 말해 시간이 혼재된 꿈속과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정신세계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과 괴리된 그런 삶이다. 시간이 제멋대로 흐르고, 몸은 현실 세계의 움직임과 다르다. 트랄파마도어 같은 비논리적 또는 비상식적 상황이 바로 빌리가, 또는 보니것이 꿈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상흔이 너무 커서 치유하기는커녕 치유할 엄두도 못 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입 밖에 내기가 어렵고, 그래서 꿈속에서 또는 일상생활의 꿈 같은 망상 또는 트랄파마도어인처럼 4차원의 시간 속에서 그는 자꾸만 상기하고 또 상기한다. 보니것이 빌리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매 순간 전쟁을 치르며 산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거나,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그만큼 내상을 입도록. 그는 전쟁을 통해 붉은 피를 흘렸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과의 전쟁에서 속이 다 문드러졌다.

충격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인 “스키넥터디에서 가장 착한 제대군인, 가장 친절하고 재미있는 제대군인, 전쟁을 가장 싫어하는 제대군인들은 실제로 전쟁에서 싸운 사람들이었다.”에서는 실제로 전쟁에서 싸운 자들만이 전쟁의 참상을 오롯이 겪고, 인간의 막창까지 들여다본 그들만이 겸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가장 비인간적인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비인간적인 자기 모습과 참상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다른 인격으로 변모해 버리기라도 했다는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어쨌든 전자라면 진정한 인간의 겸양일 것이고, 후자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것이다.

책의 초반에 전쟁에서의 대학살 뒤에 모든 게 고요하다고 말한다. 억울한 피해자는 죽었으므로 고요하고, 잔인한 가해자는 죄를 감추기 위해 고요해야 할 테다. 다만 새는 말할 수 있다. “지지배배뱃?”이라고. 새가 말하는 대파괴의 참상이 다섯 글자다. 이 지지배배뱃을 읽은 사람 가운데 폭소를 터트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 또한 그러하다. 지지배배뱃? 수많은 세상의 현상 가운데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만 보고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살아가는 우리가 지지배배뱃 이외에 무슨 말을 더 하고 더 들을 수 있을까.

작가는 “그런 거지 뭐”를 모든 죽음의 뒤에 붙인다. 너무 많은 이들의 죽음을 겪어서 그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초연해지는 것밖엔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작가 또는 빌리가 시간을 함께 공유한 많은 이들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시간을 무질서하게 유영하는 것이고, 1분이 1년처럼, 1년이 1분처럼, 트랄파마도어의 엄청난 시간이 지구에서는 백만 분의 1 정도로 느껴지는 시간 왜곡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성조기를 들고 길거리에 뛰쳐나가는 자들 또는 기독교인의 허울을 덮어쓰고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이 책을 읽어보시라. 그래봤자 수많은 문장 가운데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만 똑 떼 내어 읽겠지만.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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