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찬우 기자 = 현대자동차그룹의 최고경영진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지난해에 호세 무뇨스 사장에 이어 올해도 독일 출신 엔지니어 만프레드 하러 부사장을 승진 내정하면서 글로벌 인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미 디자인 부문도 벨기에 출신 루크 동커볼케 사장이 이끌고 있어, 현대차의 핵심 삼각축인 경영–개발–디자인이 모두 글로벌 인재로 채워지는 구도가 사실상 완성됐다. 정의선 회장이 강조해온 '실력주의'가 실체화되는 국면으로, 그룹 전략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12일 현대자동차에 따르면 양희원 R&D본부장(사장)은 전날 경기 화성시 남양기술연구소에서 주요 임원에게 퇴임 소식을 전했다.
후임으로는 하러 부사장이 내정됐다. 하러 부사장은 이르면 16일 사장으로 승진해 R&D본부장으로 정식 임명될 전망이다. 하러 부사장은 독일 출신으로 25년간 아우디, BMW, 포르쉐 등에서 섀시와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한 엔지니어다.
이번 인사는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니라, 전기차·하이브리드·자율주행 등 미래 성패가 결정되는 기술·비즈니스 전환기에 맞춘 구조적 처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현대차는 미국·유럽·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장벽 높은 규제와 거센 로컬 경쟁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으며,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으로의 전환과 자율주행 경쟁력 확대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처럼 핵심 시장 출신 리더를 전면에 세우는 현지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실제로 북미·유럽 출신 경영자들이 늘어나면 시장 접근력이 달라진다. 정부 규제 대응, 노조 및 정치 네트워크, 현지 인허가 과정에서의 영향력은 물론, 소비자 취향·가격 민감도·디지털 서비스 선호도에 기반한 제품 기획까지 정교해진다.
글로벌 완성차들이 이미 중국과 미국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현지 리더에게 제품 개발·마케팅·부품 조달 권한을 대폭 이양한 것과 동일한 흐름이다. 현대차가 같은 전략을 구사할 경우, 판매 중심의 '현지화'에서 기술·조직 구조까지 포괄하는 '심층 현지화' 단계로 도약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하러 부사장 선임의 의미는 더욱 크다. 그는 포르쉐·BMW 등에서 섀시 개발을 총괄한 정통 엔지니어이면서 애플에서 자율주행 전기차 프로젝트를 지휘한 소프트웨어 전문가라는 이력으로 주목받는다.
하드웨어 강점을 가진 현대차가 제일 목표로 두고 있는 SDV·자율주행 전환을 가속할 적임자라는 평가다.
실제로 현대차 내부에서도 R&D본부(하드웨어)와 AVP본부(소프트웨어) 간 충돌이 반복돼 왔으며, 최근 송창현 AVP본부장이 "레거시 조직과 충돌했다"고 밝힌 것도 그 단면이다. 업계에서는 하러 부사장이 양 축을 통합하거나, SDV 체제로의 전면적인 설계 전환을 주도할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 관점에서도 이번 인사는 긍정적이다. 이사회 및 경영진의 다양성은 ESG 평가의 핵심 지표로, 현대차는 이미 이사회 외국인 비중을 확대하며 지배구조 선진화를 강조해 왔다. 사장급 외국인 확대는 '코리아 인사' 중심이라는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 글로벌 톱티어 OEM으로서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신호로 작용한다.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언어·리더십·평가 체계를 자연스럽게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게 되고, 글로벌 인재 유입과 유지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분명 리스크도 존재한다. 외국인 사장단 확대는 그룹 컨트롤 구조와의 조율 문제, 노조의 반발, 내부 승진 체계의 약화 등과 충돌할 수 있다.
현대차 본사는 여전히 한국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어 외국인 리더의 권한과 역할이 실제로 얼마나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지는 제도적 정렬이 뒷받침돼야 한다. 자칫 상징적 인사에 그칠 경우 내부 갈등만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이번 카드를 꺼낸 것은 "지금 바뀌지 않으면 글로벌 톱 메이커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절박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기차는 중국이 '가격'으로 압박하고, 자율주행·소프트웨어는 테슬라·벤츠가 기술 격차를 벌리는 상황에서 현대차는 하드웨어 강점만으로는 미래 시장을 방어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다. 시장은 이번 인사를 미래차 기술 확보에 '올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외국인 사장단 체제 구축이 현대차의 장기 전략과 연결될지, 아니면 단기적 처방에 그칠지는 향후 1~2년 내 전기차·SDV 전환 성과로 확인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chanw@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