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옥찬 심리상담사ㅣ넷플릭스 드라마 <트리거>(감독: 권오승, 김재훈/각본: 권오승/출연: 김남길, 김영광, 박훈, 길혜연, 김원해, 우지현, 이석, 안세호, 양승리, 박윤호, 손보승 등)는 총기 청정국인 대한민국에서 총기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야기다.
드라마 초반 고시원생과 성범죄자의 총기 난사 등은 병적인 증오를 드러내는 것이어서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흠짓 놀라곤 했다. 등장인물들이 총을 쏠 수밖에 없는 사연들에 어느새 동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봐서다.
드라마 <트리거>가 시작하기 전에 대한민국 사람들의 전반적인 정서 상태에 대한 흥미로운 조사 발표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정신건강증진 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있다고 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정신건강 수준을 묻는 질문에는 절반 정도가 ‘좋지 않음’이라 답했다고 한다.
울분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단기적이 아닌 장기적으로 울분을 느낀다는 것은 심리상담사로서 지극히 안타까웠다. 전쟁 같은 엄혹한 시기에 억울한 고통을 당한 이들이 평생을 가슴속에 지니는 감정을 '대명천지' 한국 사회의 구성원 절반이 가지고 있다니 말이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울분은 몹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가슴에 가득한 상태다. 그래서 보통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을 쓴다.
드라마 <트리거>에서는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이 울분을 터뜨리는데 총을 사용한다. 산업재해로 아들을 잃은 오경숙(길해연 분), ‘태움’을 당하는 간호사 박소현(강채영 분), 무자비한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박규진(박윤호 분)과 서영동(손보승 분) 그리고 경찰이지만 전세사기로 딸을 잃은 조현식(김원해 분) 등은 울분을 터뜨리며 총을 든다.
드라마 <트리거>에 정신과 의사가 고시원생인 유정태(우지현 분)에게 트리거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은 모두 마음속에 트리거가 하나씩 다 있어요. 하지만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그 트리거를 당기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대로 절대로 트리거를 당기지 않으려면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건강하려면 심리내적인 요인도 크지만, 심리외적인 요인 즉, 환경의 영향도 크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수가 울분이 쌓이지 않도록 사회적인 시스템이 작동을 잘해야 한다.
드라마 <트리거>에서 대한민국에 총기를 퍼뜨리는 문백(김영광 분)의 인생 이야기가 나온다. 문백은 사이코패스처럼 아무렇지 않게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생을 살았다. 문백이 사는 세상은 어린 문백을 버리고 물건처럼 사용하다 폐기하려고 했다.
문백은 대한민국에 총기가 마약처럼 흔해질 수 있다고 하면서 말한다.
“지금 한국은 정서적 전쟁 상태야.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이 만연하다고. 그냥 누군가 트리거만 당겨주면 돼”라고 말이다. 문백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혼란스러움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정신건강증진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10명 중 7명이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할수록 울분 수준도 높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육마저 그렇다.
한국에서는 아이들마저 초등학생 때부터 선행학습을 하면서 대학입시 경쟁을 한다. 그런데 입시 경쟁에서는 사교육비와 교육환경을 뒷받침할 수 있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Socioeconomic Status, SES)가 큰 영향을 미친다. 교육에서의 불공정함마저 당연시하는 사회가 되어 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드라마 <트리거>에서 보이는 울분은 단순한 화나 짜증과는 다른 깊이를 가진다. <트리거>에서 총을 든 사람들의 울분은 오랜 기간 쌓여온 부당함, 좌절감, 상실감 등이 해소되지 못하고 응축된 심리 상태다. 이러한 울분은 억울함과 분노가 오랜 기간 억제되거나 사회적으로 표현되지 못해서 정서적인 에너지가 안으로 쌓이고 굳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다가 울분이 터지면 타인을 향한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마치 드라마 <트리거>에서 총을 든 사람들이 트리거를 당기듯이 말이다.
드라마 <트리거>에서 학교폭력 피해자인 서영동(손보승 분)이 학교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들 뿐만 아니라 어찌 보면 학교폭력을 방조한 아이들에게 총기난사를 한다. 주임 선생님이 영동을 말리는 데 영동은 울분을 토하며 말한다. “이제 와서요? 선생님 제가 여러 번 찾아갔잖아요. 나 진짜 힘들다고. 너무 힘들다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이처럼 울분이 쌓여 극단적으로 폭발하기 전에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드라마 <트리거>에서 볼 수 있듯이 울분은 사회 구조와 문화와 개인의 경험이 얽혀서 형성된 복합적인 정서다. 울분이 분노조절장애처럼 나타나기 전에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개인의 억울함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문화적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울분이 증오와 폭력으로 폭발하기 전에 사회 변화와 연대의 에너지로 전환되도록 서로 돕는 사회적 지혜가 절실하다.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상대에 대한 분노가 트리거가 되는 사회는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한국인들이 바라는 미래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 최옥찬 심리상담사는
"그 사람 참 못 됐다"라는 평가와 비난보다는 "그 사람 참 안 됐다"라는 이해와 공감을 직업으로 하는 심리상담사입니다. 내 마음이 취약해서 스트레스를 너무 잘 받다보니 힐링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주 드라마와 영화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찾아서 소비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글쓰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