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자력발전소 사고 상황에서 ‘수소 폭발’ 위험 등을 평가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연구소가 기존 버전의 한계를 인정하며 2010년대 후반 최신 버전을 내놨지만, 국내 당국은 지난해 실시한 평가에 기존 버전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소 폭발을 막기 위해선 보다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미국 전력연구소는 2017년 ‘중대사고 해석 시뮬레이션 프로그램’(MAAP·맵) 최신 버전 ‘5.04’를 배포하면서 이전 버전들에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맵은 미국 전력연구소가 라이선스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원전 안전성 검증 프로그램 중 하나다. 원전 사고 상황을 예측하고 안전성을 분석해 원전 중대사고(쓰나미 같은 설계 범위를 넘는 요인으로 핵연료 손상이나 방사성물질이 누출되는 사고 등을 의미)를 대비하는 데 사용된다.
미국 전력연구소가 2019년 발행한 맵5.04 설명서를 보면 “1990년대 나온 맵4 버전은 (수소 등) 가벼운 기체가 성층화되는 경향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일부 기능을 추가했다”면서도 “수소 성층화로 이행되는 보다 광범위한 현상들을 포착하기에 한계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수소 성층화는 대기보다 가벼운 수소가 원전 내부 상단에 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수소가 한곳에 몰리면 폭발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개선된 맵은 수소 성층화를 포착하는 역할을 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국내 당국이 지난해 5월 발표한 중대사고 수소 분석에서 사용된 건 맵4.06 버전이다. 맵4 버전은 공간 전체 수소 농도의 ‘평균값’을 측정하지만 맵5.04부터는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눠 수소 농도를 측정해 보다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안전당국이 맵4.06 버전으로 측정해 수소 밀집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그간의 대형 원전 사고가 핵연료봉이 과열되면서 생성된 수소가 폭발한 사고인 만큼, 한 구역에 밀집될 수 있는 수소의 폭발 위험성을 규명해야 한다는 취지다.
2021년 국내 원전에서 사용하는 수소제거기(수소를 물로 만들어 수소 농도를 낮추는 장치)에서 불꽃이 일어난다는 공익제보로 안전 문제가 불거졌다. 안전당국은 지난해 5월 발표한 성능 검사 결과에서 “격납 건물의 안전성에 영향 없다”고 결론 내렸다. 원전 격납계통을 30여개 구획으로 나눠 맵으로 확인한 결과, 불꽃 현상이 발생해도 원전 내 수소 농도가 안전 기준치인 10%에 못 미쳐 수소 폭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안위 관계자는 “맵5가 수소 농도 분석을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맵4를 이용해도 농도 분석에서 큰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원전 분석 구획을 30개 정도로 나눠서 수소 농도의 차이를 분석했고, 맵4로 수소 농도를 분석하는 것도 충분하다는 해외 연구가 많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한병섭 원자력안전방재연구소 이사는 “공기 흐름을 평가하기 위해선 (범위를) 아주 잘게 잘라 분석해야 하는데, 기존 맵 분석은 원전 1기를 집 한 채 크기만 한 30개의 큰 덩어리로 나눠 해석하는 것”이라며 “분석 단위가 크면 클수록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안전평가 체계를 전면 재정비하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과학적 검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