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엔 없고 인간에겐 있다…발견의 희열·경이

2025-12-04

인간지능의 역사

이은수 지음

문학동네 | 440쪽 | 2만3000원

인공지능의 출현과 함께 인문학자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인간만이 고도의 지능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지능의 총량이나 효율성에서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열등해질 수 있다면,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는 근원적 질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서양고전학자이자 서울대 인공지능 디지털인문학센터장인 이은수 교수(철학과)는 <인간지능의 역사>에서 수천년 인류의 지성사를 ‘발견’ ‘수집’ ‘읽기와 쓰기’ ‘소통’ 등 네 가지 키워드로 재조명한 뒤, 각각의 영역에서 인공지능과 구분되는 인간지능의 고유성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저자는 인간지능의 의미를 역사적 맥락에서 살피는 인문학적 작업이야말로 “인간과 인공지능 기술이 공존하는 미래”를 찾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믿는다.

‘발견’은 인간지능의 출발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는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고, 유클리드는 기하학의 원리를 발견했다. 페르시아의 알콰리즈미는 대수학의 원리를 발견했고, 이슬람 학자 이븐 알하이삼은 빛이 외부 물체에서 반사돼 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들은 그리스 고전들을 ‘재발견’했다. 17세기에 접어들자 ‘발견’은 텍스트 외부에서, 실제 자연을 대상으로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너무 멀어서 매끈해보였던 달의 표면이 실제로는 울퉁불퉁한 지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로버트훅의 현미경은 너무 작아서 보지 못했던 미시세계의 다채로움을 알려주었다.

지식의 ‘수집’은 문명의 토대를 놓았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시설이 단순한 책 보관소가 아니라 “지식의 전체 지형도를 파악하고 그 안에 질서를 부여하며, 연구자가 원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체계적인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기 수집은 인문학의 생명유지 장치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이 유럽 각지의 수도원 장서고를 뒤져 고대 문헌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하면서,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잊혔던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이 부활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자들은 지식 해석을 독점해온 교회와 스콜라 철학에 맞서, “고대 문헌을 직접 읽고 해석하며 이성과 자유,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발전시켰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백과사전 편찬작업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불씨가 된 것은 지식의 수집이 정치적 진보와도 직결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읽고 쓰기’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지식의 발견과 수집이 문명을 창조했지만 “그 모든 지적 성취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읽고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서였다.” 문명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이동하는 ‘거대한 전환’ 위에 구축됐다. “언제든 앞부분으로 돌아가 내용을 다시 확인하거나 다른 부분과 비교·대조하며 검토할 수” 있는 문자와 글쓰기는 “과학적 탐구나 철학적 논증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지적 기반이 되었다.” 5000년 전 등장한 읽기와 쓰기 기술이 책과 출판, 인쇄기술의 발전을 거치며 구술문화를 밀어내는 과정은 새로운 기술이 동요와 반발 속에서 사회에 정착할 때 거치는 전형적 패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인간 존재의 고유성 위협하는 AI

인류 지성사 통해 인간지능 탐구

‘발견’‘수집’으로 문명 토대 구축

‘읽고 쓰기’‘소통’지적 혁명 발전

의미 부여·윤리적 한계 설정 등

지식에 대한 태도는 인간만 가능

AI 협업 시대, ‘주체성’ 더 소중

읽고 쓰기가 개인적 차원에서 지적 혁명을 일으켰다면, 그 혁명이 집단적 지성으로 발전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것은 ‘소통’이다. 한 개인의 지식은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검증되고 확장됐다. 특정 지역에서 산출된 지식은 ‘소통’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리스인들은 지식 소통에서 알레테이아(진리), 이세고리아(모든 시민의 동등한 발언권), 파레시아(위협 속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중시해 ‘소통’의 윤리적 기초를 세웠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지식인들의 공통언어나 마찬가지였던 라틴어와 학자들 사이의 서신 교환이 지리적 단절을 넘어서는 지적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오고 가는 데 몇달이 소요될 만큼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서신을 통해 지식의 전파는 물론이고 격렬한 학문적 논쟁까지 가능했다는 사실은 인간이 지닌 지적 소통의 열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웅변한다.

인류의 지성사를 돌아보는 작업이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의 본질적 차이에 대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에서는 인간이 수천년 동안 ‘발견’에서 느껴온 “희열, 설렘, 경이라는 감정”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인공지능이 인간이 접근 불가능한 수량의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검토해 새로운 연관성을 발견하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윤리적 한계와 책임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소통은 실제 세상, 실제 인간과의 접촉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인공지능에는 그러한 “체화된 경험”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다. “아무리 인간의 말과 감정을 정교하게 흉내낸다 한들,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는 자율적인 의지나 소통하려는 진실된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지식이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구축된 가상 환경 속에서” 생성되는 시대로 진입했다. 저자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협업이 중요해진 동시에 인간 주체성에 대한 인식은 더욱 소중해졌다고 강조한다.

“인간의 주체성은 외부 영향(알고리즘 포함)으로부터 자유로운 고립된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환경과 기술적 조건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것을 활용하거나 때로는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와 행동을 창조해가는 능동적인 과정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AI 시대의 도전은 우리에게 수동적인 정보 소비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기술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고 책임지는 ‘창조적 행위자’로서의 가능성을 확장하도록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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