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낱말 순장殉葬
최광복
낱글은 삐뚤어도 마음체는 정갈했다
여백마다 남기신 다정한 삶의 조각
가녀린 문장의 늑골, 초행길이 보인다
유품을 정리하던 손끝 먼저 울컥한다
받침도 빼먹고 들머리도 완성 못한
점점이 절룩거리는 어머니의 손일기장
차상
그녀의 바다
최애경
물속 긴 날들은 피리가 되어 있다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하는 곡
참아온 숨으로 짚어야 음 하나씩이 풀린다
뼈에 구멍을 뚫어야 피리가 된다는데
비린 숨 그보다 먼저 뼛속에 길이 나
바다는 청춘을 데리고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물옷을 벗을 때쯤 석양이 밀려오고
물옷보다 무거운 퉁퉁 불은 하루를 지고
휘어진 등뼈 하나가
뭍으로 올라간다
차하
서쪽을 볶다
이연순
굽은 등의 노모차를
들판이 끌어당겨
참깨 몇 단 옆에 두고
한숨을 터는 동안
금 새 온 저녁노을이
낱알을 걸러준다
가벼운 바람 앞에
쭉정이로 쌓인 오늘
백발이 된 시간이
힘없이 날아갈 때
서쪽은 빈 몸인 채로
젖은 몸을 볶아낸다
이달의 심사평
사람마다 가슴 한 켠에 크고 작은 소망 하나쯤 품어보는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 첫 달의 중앙시조백일장 응모 현장은 뜨겁다. 소중하게 키워온 타자의 시심과 마주하는 것은 기대와 설렘을 동시에 맛보지만, 한편으로는 막중한 책임감에 따른 무거움이 크다. 새해라서 그런가, 이달에는 만고불변의 시적 명제인 어머니에 대한 글이 유난히 많았다.
이달의 장원 작품으로 최광복씨의 ‘낱말 순장殉葬’을 올린다.
언어 예술이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는 양식이 아닌 우리의 감정에 가 닿아야 하는 것이라면, 어머니의 한 생이 담긴 일기장만큼 좋은 소재도 드물 것이다. 자칫 단순한 정서 토론에 그칠 수 있는 주제를 중층적인 의미가 배어나도록 유기적으로 직조한 시적 구성이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고 완성도 높은 글이라서 쉽게 합의에 도달했다.
차상으로는 최애경씨의 ‘그녀의 바다’를 선했다. 자맥질 뒤에 내뿜는 길고 가느다란 숨비소리가 피리 소리와 같아 “참아온 숨으로 짚어야 음 하나씩이 풀린다”라는 표현미가 인상적이다. 곡진한 생의 기미를 읽어낼 줄 아는 것은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라 하겠다. 특히 바다에 청춘을 바친 사람의 삶이 잘 드러난 둘째 수는 사려 깊은 성찰에서 오는 사유를 리듬에 실어 잘 전달하고 있다.
차하로는 이연순씨의 ‘서쪽을 볶다’를 선했다. 계절이 가면 낱곡도 영글어 수확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도 푸른 시절을 지나면 허리가 굽는 시절에 닿는다. 노년의 노동을 자연물에 버무려 포착할 줄 아는 시선과 무리 없는 소통을 통해 삶의 비의를 무겁지 않게 담아내고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심사위원 정혜숙·강정숙(대표 집필)
초대시조
박달나무 꽃피다
문순자
박달나무 박달나무 긴 주걱 따라가면
밥 달라 밥 달라는 예닐곱 살 구엄바다
무쇠솥 처얼썩 철썩 휘젓는 어머니의 노
제천장 좌판에서 그 주걱 또 만났네
한세월 거슬러온 박달재 고갯마루
아버지 낮술에 묻어 ‘희망가’도 따라왔네
오늘은 김장하는 날, 친정집은 잔치마당
젓갈이며 고춧가루 세상사 휘젓고 나면
한겨울 긴 주걱 끝에 덕지덕지 피는 꽃
◆문순자
199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시학젊은시인상, 한국시조작품상, 노산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파랑주의보』 『아슬아슬』 『어쩌다 맑음』 100인 선집 『왼손도 손이다』
제주 애월 “구엄바다”는 시인의 고향인가 보다. “밥 달라는 예닐곱 살” 칭얼거림에 박달나무 주걱은 “어머니의 노”가 된다. 파도를 끌고 와 “무쇠솥”에 쏟아 붓고 “처얼썩 철썩” 노 젓기는 밥이 끓어 넘치도록 부르는 어머니의 땀 젖은 노래로 상상해본다.
박달나무 주걱을 제천장날 또 만나게 된다. 목청을 뽑아가며 “박달재”를 넘는 “아버지” 손엔 고등어 한 손, 줄줄이 사탕이 들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시대는 아득히 멀어졌지만 낮술 묻은 “희망가” 한 소절은 엄동설한(嚴冬雪寒)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박달나무 주걱은 “김장하는 날” 또다시 등장한다. 낮게 앉아 짜고도 매운 세상 버무려가며 한평생 보통으로 사는 일도 시인의 시 한 편처럼 아름다운 일 아닐까.
시조시인 이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