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 금융협력 논의와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유럽을 방문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곤혹스러운 출장"이라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현지에서 수 차례 열린 미팅이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의 사퇴 등 국내의 정치적 불확실성을 해명하는 자리가 돼서다. 특히 이 총재는 금리인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며 얼마나 빠르게 갈지는 데이터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5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한국은행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계엄사태, 탄핵정국 등)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한 주"라며 이 같이 밝혔다.
지난 4일 밀라노에 도착한 이 총재는 나흘간 일정으로 제25차 한일중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제28차 아세안+3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제58차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 연달아 참석한다. 이어 7일부터 9일까지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 마티아스 코만 OECD 사무총장 및 국제금융계 인사들과 면담하고, 10일부터 12일까지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국제결제은행(BIS) 총재회의에 참석할 계획이다.
이 총재는 한일중 회의에서 역내 경제동향과 금융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아세안+3 회의에서는 금융·경제 상황과 리스크 요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의 실효성 제고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 같은 국제무대에서 최 부총리의 급작스러운 사퇴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면서 진땀을 뺐다는 게 이 총재의 설명이다.
이 총재는 "미국의 상호관세 유예가 끝나는 오는 7월 9일까지 우리가 큰 손해보지 않도록 노력해왔다고 차기정부에 전달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함께 고생한 사람이 그만두고 나니 사기가 떨어진 건 사실이고, F4 회의의 지속 여부는 새로 오실 기재부 장관이 결정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5월 금리인하 가능성↑···"대선 상관없이 데이터만 본다"
특히 이 총재는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기조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며 연내 추가적인 금리인하를 예고했다. 다만 대내외 불확실성이 큰 만큼 당장 이달에 기준금리가 내려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데이터를 보고 결정하겠다"며 신중한 입장을 내비쳤다.
이어 "기준금리 결정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데이터는 민간소비"라며 "내수가 생각보다 안 좋은데 위축된 투자도 걱정"이라며 "신용카드 사용실적 등 5월 초 소비가 얼마나 늘었을지가 최대 관심사고, 정치적 불확실성 계속되는 상황에서 투자액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도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5월 금통위는 대선 1주일 전에 열리지만, 선거와 상관없이 데이터만 보고 기준금리를 결정하겠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러면서 "국내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소비심리 뿐만 아니라 기업의 투자에도 매우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대선이 빨리 끝나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수면 밑으로 내려갔으면 좋겠고, 그 사이에 금융시장이 흔들리지 않게 잘 관리하는 것이 최대 목표"라고 부연했다.
이 총재는 올해 세 차례 기준금리 추가인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기준금리를 성장만 보고 결정하지는 않는다"며 "환율도 이번주는 좋은 방향으로 갔는데 불확실성은 여전히 크고, 금리인하가 부동산 시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봐야한다"고 답했다. 기준금리를 더 낮출 이유는 충분하지만 어디까지 내려갈지, 언제 내릴지는 이달 말 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다시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경기부진을 고려한 1%대 금리 진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기준금리가 1%대로 내려가려면 아직 많이 남았다"며 "최종금리를 어디까지 내려야 하냐고 묻는다면 데이터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할 수 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한국은행법은 내수진작, 경기활성화 등을 정책목표로 두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한국은행법에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통해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며 "국민경제 발전에는 당연히 성장이나 고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법적으로 당연히 내수진작에 대한 근거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고, 다만 성장만 보고 통화정책을 판단하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 총재는 "최근 정치상황 때문에 중립금리가 바뀌었냐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라며 "금리인하를 어느 속도로 가야되는지 논의할 상황이지 중립금리 자체를 단기적으로 재조정하는 논의를 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기준금리 인하 기조가 가계부채를 다시 자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98%선에서 90%선까지 내려왔지만, 이론적으론 금리 추가 인하 시 이 같은 흐름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4,5월에 가계부채가 늘어난다면 이자율보다는 토지거래허가제 해제 영향이 크다고 봐야하고, 6월부터는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원·달러 환율, 레벨보다 변동성이 문제"···기재부와 美 공동 대응
변동성이 높은 원·달러 환율에 대해서는 "최근 환율이 1380원대까지 떨어졌지만 내려올 만큼 다 내려왔다고 판단하긴 이르다"라며 "아시아 통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건 미중간의 무역협상이 진전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환율의 레벨 자체보다 변동성이 문제"라며 "우리나라 외환시장은 거래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씬 마켓'인데, 갑자기 오르거나 내려가면 주문이 한쪽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양방향의 변동성을 모두 경계할 수 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이 총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대만,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 정부와 환율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기대감이 시장에 퍼진 것 같다"며 "다만 실질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고, 고환율은 장단점이 모두 있기 때문에 변동성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환율에 대해 어떤걸 요구할지, 어떻게 앞으로 움직일지는 불분명하다"며 "기획재정부가 미국 행정부와 실무적으로 계속 얘기하면서 앞으로 몇주간 더 명확해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고 부연했다.
미국과의 실무진 협의에 한은도 참여하냐는 질문에는 "미국의 환율은 재무부가 담당하고 중앙은행(연준)은 전혀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카운터파트는 기재부"라며 "다만 우리나라는 한은과 기재부가 (환율 분야에)공동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내부적으로는 함께 논의하고 있다"고 답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를 추진할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해서는 "코멘트하는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은 많은 나라와 양자간 대화를 추진하고 있고, 각국은 미국이 뭘 요구하는지 파악해 대응할 것이란 설명이다.
구조개혁 목소리 계속 낸다···관봉권 논란엔 "근거 없어"
이 총재는 최근 논란이 된 '한은 관봉권'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이 총재는 "한은은 정사를 통해 깨끗한 화폐를 다시 모은 뒤 '사용권'이라는 이름으로 금융기관에만 내준다"며 "현재 나오는 얘기들은 근거가 전혀 없는 애기고, 국정원에 돈이 가더라도 금융기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해명했다.
이 총재는 통화정책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한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건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라 한은이 믿을만한 기관이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브랜딩(신뢰 이미지 구축 과정)을 위한 것"이라며 "한은의 얘기에 어떤 누구도 도전하기 어려운 브랜딩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발표된 정년연장 보고서도 굉장히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며 "금리인하 실기론부터 시작해서 잡음이 많지만, 한은의 연구결과를 다른 민간기관과 같은 비중으로 언론에서 보도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부연했다.
또한 이 총재는 한은의 금리인하 '실기론'에 대해 매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 총재는 "지난달 금리를 동결하지 않고 내렸다고 해서 경제상황이 현재와 얼마나 달라질수 있나"라며 "금리를 아예 내리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앞뒤로 한두달 차이를 실기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지분형 모기지 우려는 기우···'한강 프로젝트' 은행권에 일침도
금융당국이 추진하는 지분형 모기지론에 대해서는 "지분형 모기지는 집값 잡으려는 정책 아니고 가계부채 부담을 에쿼티(지분) 방식으로 낮추자는 것"이라며 "금융위원화게 6월에 정책구상을 내놓기로 했고, 집값 상승을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이 총재는 '한강 프로젝트(디지털화폐·CBDC)'에 대한 회의론에 대해서도 "성급한 평가"라며 선을 그었다. 이 총재는 "거래량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디지털화폐가 실패했다고 한다면 파일럿 자체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며 "예금토큰이라는 원화 표시 스테이블코인 환경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어 양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거래량이 많지도 않은데 디지털 화폐 활성화를 강요한다고 불평하는 은행 실무자들도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미래를 내다보고 비즈니스를 키울 생각을 해야지 당장의 규모만 보는 것은 근시안적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