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말 비상계엄 사태 직후 기업들은 큰 홍역을 치렀다. 갑작스러운 뉴스에 놀란 해외 투자자와 바이어들로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문의가 빗발치면서다. 정부의 ‘밸류 업 프로그램’에 고무돼 장기 투자금을 들고 들어왔던 한 기관투자자는 “북한 변수까지 모든 리스크를 검토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며 푸념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들을 달래느라 기업들도 진땀을 흘렸다. 한 기업의 IR 담당자는 “과거에도 숱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지만 경제와 기업은 돌아갔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무역전쟁 속 성장률까지 추락
경제사령탑 하차로 리더십 공백
신인도 흔드는 정치불안 없어야
정부라고 별 뾰족한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에 ‘정치와 별개로 경제는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내보냈다. 한국은 정치적 혼란을 해결할 능력이 있고, 경제 시스템은 흔들림 없이 작동할 것이란 얘기였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까지 거들고 나섰다. 외신 인터뷰를 자청해 “경제 콘트롤타워가 확실하고 경제 정책도 정상적으로 집행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 총재가 이즈음 정부와 정치권에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촉구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는 “여·야·정이 합의로 추경을 처리하는 모습 자체가 정치적 갈등과는 별개로 경제는 챙긴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상황은 수습 국면으로 흘러갔다. 가장 우려했던 국가 신용등급 강등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도 극한 충돌은 없었고, 조기 대선 일정도 확정됐다. 시장도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요동치던 환율과 주가지수가 회복세를 탔다. 한발 늦었지만, 추경도 여야 타협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렇게 최악의 사태는 피하는 듯했다. 하지만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더 짙은 불확실성의 먹구름이 한국 경제를 뒤덮기 시작했다. 국정 관리를 맡았던 한덕수 대통령 권한 대행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중도에 나가자, 민주당은 뒤를 이을 최상목 경제 부총리의 탄핵안을 상정했다. 최 부총리는 표결 직전 스스로 사퇴했고 권한 대행 ‘바통’은 결국 이주호 사회 부총리에게 넘어갔다.
이미 ‘대대행’체제도 겪었는데 ‘대대대행’이라고 별일 있겠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사령탑마저 부재한 초유의 리더십 공백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해외에선 정치 혼란이 선을 넘기 시작했다는 시그널로 읽힐 수 있다. “그래도 경제는 돌아간다”는 우리의 설득 논리도 더는 힘을 받기 어려워질 수 있다. 앞서 2월 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간 지속할 경우 정책 결정의 효율성, 경제 성과, 재정 건전성 등이 악화할 수 있다”는 경고를 덧붙였다.
타이밍도 극히 나쁘다. 밖으로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무역 전쟁이 한창이고, 안으로는 내수가 얼어붙으며 1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한 상황이다. 최 부총리 퇴진 소식을 전하는 외신 보도도 이를 아프게 콕콕 짚고 있다. 블룸버그는 “한국의 정치 위기를 심화시키는 또 다른 충격적 전개”라며 “리더십이 회전목마(merry-go-round)처럼 돌아가는 상황은 이미 1분기 역성장을 경험한 한국을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취약한 입지에 놓이게 할 것”이라고 했다.
당장 우리 기업들의 생존을 좌우할 미국과의 협의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 협상단의 키를 쥔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의 카운터파트가 사라진 셈이니 말이다. 협상 타결은 새 정부의 몫이라 해도 협상 초기 틀을 제대로 짜고 상대를 설득해 놓는 게 중요한데 그 핵심 채널을 우리 스스로 닫아버린 셈이 됐다. 미국의 협상 시간표가 우리 사정을 헤아려 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무역전쟁이 환율전쟁으로 확전하고,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칠 위험도 상존한다. 지금 같은 리더십 표류 상황에선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으니 그사이 별일 없기만 바라야 할까. 하지만 위기는 순식간에 닥친다. 이미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때 값비싼 경험을 치렀다. 경제 여건이 문제였다지만 문제를 해결할 정부와 정치권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게 결정타였다.
계엄과 탄핵 정국이 불러온 충격파를 감안하면 그 수습 과정에서 갈등과 진통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멈춰야 할 땐 멈춰야 한다. 혼란이 더욱 증폭돼 대외신인도까지 흔들리는 공멸의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 누가 그런 최소한의 책임감을 갖췄는지 유권자들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