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기는 아버지 김창숙이 백양사에서 요양하던 1936년~1937년에 대구와 경상북도 칠곡에서 혁명적 농민 조합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며, 나아가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또 독서회도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키우고, 계급 의식을 심화하였다. 1937년 일제가 일으킨 중일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일제의 패전을 위해 후방을 교란하는 반전 반제 운동(反戰反帝運動)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김찬기와 손응교는 1938년 첫째 아들 김위를 낳았다. 손응교가 임신했을 때 남편은 일제 경찰에 잡혀 징역을 살았다. 그때가 22살이었다. 5월 초순 김창숙은 처음 손자를 안았고 이 아이를 종손으로 삼고 싶어 했다. 당시 남편은 징역을 살고 있었다. 김찬기는 진주고보 학생 운동 이후 조선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것을 각오하고 지하로 잠입하여 대구 중앙동 파출소 뒤에 책점을 경영하며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피검돼 4년 동안 형무소 생활을 했다.
김찬기가 2년 감옥 생활할 때 김창숙이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9월 그믐께 손응교가 편지로 예심에 회부 되었음을 알려왔는데 어제는 다시금 병이 위독하다고 알려왔다. 허약한 체질로 몇 년씩 고문을 받아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오장육부가 터질 듯 김창숙은 슬픔에 잠겼다. 집안 재산을 모두 기울여 치료하겠다고 하고 병구완에만 신경을 쓰고 집안일은 염려하지 말라며 고금동서(古今東西)의 책을 궁구하면 병도 잊고 병도 물러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940년 4월 일제는 김창숙에게 울산 백양사에서 집에 돌아가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허용했다. 김창숙은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였으며, 이해 모친 인동 장씨가 사망하여 21년 만에 다시 고향인 성주 금산동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했다.
김찬기의 공훈록에 따르면, 1939년 2월 이른바 왜관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41년 3월 보석(保釋)으로 가석방되었다. 아들이 4살 때였다. 김찬기는 석방되고, 손응교도 성주에서 생활하였다. 집행원부에 따르면 김찬기는 1940년 1월 20일 구류 갱신이 결정된 이후 총 6번의 구류 갱신 결정이 11월 18일까지 있었다. 대구지검의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김찬기(金燦基, 25세, 경상북도 대구부 동성정 3정목 66번지)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으나. 1941년 3월 7일 대구지검에서 예심 면소 판결을 받았다. 김찬기의 형무소 생활은 김창숙과 손응교의 기록과 법원 기록에 차이가 난다.
김창숙의 기록에는 손응교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손응교의 구술에 따르면, 김창숙이 “출옥한 뒤로 병원 계실 때부터 의복이고 음식이고 약이고 대소변 받아내고 혼자 다했어요. 아무도 없어. 가족이라고 …… 한시도 떠나지 못하고 때맞춰 대소변 받아내고 내가 쭉 모시고 있었지. 나는 시집을 와서 사는기 조국 독립과 심산 선생을 위해 종처럼 살았는 것이지. 내 인생이라꼬는 없었어.”라고 하였다.
김창숙이 울산 백양사에 요양하던 1936년에서 1940년 중에 손응교는 1939년 첫째 아이를, 1941년에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이 사실을 통해 백양사에서 손응교의 김창숙 병수발 가능성은 적은 듯하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남편 김찬기는 경북 왜관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하고 있었다. 손응교는 남편과 떨어져 있기보다 같이 생활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창숙의 기록에는 백양사에서 방 한 칸의 ‘백양산방’에서 생활했으며 며느리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손응교는 백양사에 드나들면 김창숙의 심부름을 하였던 것 같다. 실제적 병수발과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밀서) 전달 등은 1940년 이후 함께 살 때 본격화된 듯하다.
김창숙이 울산 백양사에서 요양을 끝내고 성주로 돌아갔을 때도 일제 경찰은 이웃집 ‘동강정사’을 얻어놓고 감시를 계속 이어갔다. 김창숙과 연락을 꾀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은 거지로 변장하고 손응교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손응교가 김창숙과 생활한 것은 아마도 1940년 이후인 듯하다.

손응교는 김창숙의 분신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심산 선생이 백양사 계실 때도 가면 이건 누구에게 뭐를 전해라, 저건 누굴 전해라 해서 전했다.” 또 거지들이 신분 위장하여 백양사를 오면 김창숙의 편지를 전달했다. 심지어 중국 봉천까지도 갔다. 다리를 못 쓰는 시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창숙의 입과 발이었다. 손응교는 김창숙을 대신하여 만주와 중국을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 오가며 김창숙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달하였다고 한다. 손응교는 김창숙이 주는 비밀문서를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몽양 여운형, 만해 한용운, 벽초 홍명희가 있고 나중에는 만주에서 이시영도 만났다. 그러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고, 그럴 때면 ‘시말서’를 쓰고 나왔다. 이런 활동에 대한 교차검증이나 실증적 자료는 없다. 아무튼 손응교는 며느리뿐만 아니라 항일여성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인생은 험난했고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했다. 독립운동하는 집에 시집와 잠 한 번 제대로 못 잤다.
손응교는 1941년 딸 김주를 낳았다. 김찬기는 출옥 후 만주 어느 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지 못하고, 거주지를 제한당하여 표면상 일체의 항일 활동을 중지한 상태로 지내다가 고향 성주군 수륜면의 금광인 다락광산에 위장취업해 일했다. 그곳에서 출입증명서를 만들어 1943년 12월 일경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중국으로 탈출했다. 남편은 떠나면서 “아이들은 남한테 보내지 말고 같아 살아야 한다. 앉은뱅이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며 떠났다. 김창숙에 따르면, 김찬기는 17세 때부터 혁명 사상을 품어 누차 투옥되었고 일본 경찰이 늘 미행하여 감시가 심하므로 국외로 망명시킨 것이었다. 손응교는 남편의 중국 망명 출발 시기를 김창숙이 조부 시묘살이하는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김창숙에 따르면, 시기는 1943년 겨울이며 김찬기의 망명은 그의 권유였다.
김찬기는 8, 9년이나 옥중생활을 하였다. 1943년 7월에 중경으로 탈출하다가 북경 영사관 경찰에 붙들려 8개월간 고생하였고 병으로 입원 중에 다시 탈옥하여 중경으로 들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이었다. 감옥 생활로 김찬기의 몸은 약했다. 김창숙은 1945년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었다. 당시 비밀문서 잔심부름을 손응교가 하였다.
남편이 중국으로 떠난 지 채 2년이 안 되어 해방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날아든 남편의 사망 소식은 그녀에게 큰 절망을 안겨 주었다. 손응교와 김찬기는 1933년 결혼했으나 김찬기의 독립운동으로 같이 생활한 기간은 12개월 정도로 짧았다. 김찬기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에서 9월 12일 사망(32세)하였다. 그 소식은 해방이 되어 김구 주석이 김창숙을 방문해 알려줘서 들을 수 있었다. 손응교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목이 잠겨 한 5개월 동안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정인보는 김찬기의 죽음을 듣고 다음 시를 남겼다.
“가기를 엇지간고 만리(萬里)뿐가 도산검수(刀山劒水)/ 옥(玉)도곤 귀한 선비 게서고만 흙이라니/ 안 헤저 다시온단들 뉘라 권줄 줄 알리요”
김찬기의 유해는 1947년 10월 돌아왔다. 11일 성균관회(成均舘會)에서 추도회를 열고, 12일 대구 동화사 포교소에 안치되었다가 13일 고향 성주로 향했다. 아마 이즈음에 장례식을 한 듯하다. 김창숙은 스물일곱에 청상이 된 둘째 며느리에게 담뱃대에 불을 붙여달라고 하면서까지 담배를 가르쳤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걸음조차 어려운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어 삯바느질로 힘겹게 생계를 꾸린 젊은 며느리에게 베푼 시부의 사랑이고 위로였다. 일찍이 그이는 만주와 중국에 세 번, 국내는 30여 차례나 오가며 심산이 국내외 독립운동가에게 보내는 ‘비밀편지’를 전했던 숨은 독립유공자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되었다. 시아버지 김창숙은 쉬지 않고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반독재 투쟁을 이어갔다. 이러한 김창숙의 곁에는 늘 손응교가 있었다. 1953년 아버지 손후익도 세상을 떠났다. 1962년 시아버지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김창숙이 세상을 떠나고 자녀들과 서울에서 생활하던 손응교는 1990년 청천서원 복원을 위하여 서울에서 성주로 내려온 이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김찬기는 항일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07년 10월 18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620번에 안장되었다. 손응교는 70여 년을 홀로 살다가 2016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남편과 같이 대전 현충원에 합장되었다.
이병길 작가 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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