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캠프 헨리’에 이름 남긴 美 전쟁 영웅, 언제쯤 귀환할까

2025-09-01

1940년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로 발탁

2차대전 종전 후에도 육군에 그대로 남아

6·25전쟁 때 ‘살신성인’… 명예훈장 수훈

사후 75년 지났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해

캠프 헨리(Camp Henry)는 캠프 워커(Walker)와 더불어 대구의 대표적 주한미군 기지다. 그 이름은 6·25 전쟁 초반 자신을 희생해 부하들을 구한 프레드릭 헨리(1919∼1950) 미 육군 대위를 기리고자 제정한 것이다.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인 헨리는 7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고향과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헨리의 75주기 기일인 1일(현지시간)에 맞춰 그의 공적을 기리는 장문의 글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6·25 전쟁 당시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운 한·미 양국의 동맹이 여전히 굳건함을 널리 알리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헨리는 1919년 9월 미국 중남부에 자리한 오클라호마주(州)에서 태어났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40년 미국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징병제를 도입했다. 헨리는 21세가 된 1940년 9월 육군에 입대했고,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대전에 뛰어든 뒤로는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원래 병사였으나 충성심과 리더십을 인정받은 끝에 종전 직전인 1945년 특별히 장교로 임관해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전후 헨리는 야전병원 간호사와 결혼해 두 자녀를 낳았다. 제대하는 대신 육군에 계속 남는 길을 택한 헨리는 중위로 진급했고, 1950년 6월 당시 미 서부 워싱턴주에 주둔한 제2보병사단에 복무하고 있었다. 그해 6월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리상 한국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2사단에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6·25 전쟁 초반 한국군의 전력은 보잘것없었다. 미군이 황급히 투입되긴 했으나 그들도 탱크 등 중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1950년 8월쯤이면 영남을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에 점령된 가운데 한국군과 미군은 비좁은 낙동강 방어선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1950년 9월1일 헨리는 2사단 28연대 예하 소대장으로서 경북 안동의 한 능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숫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이 대포와 박격포를 쏘며 공격했다. 헨리는 겁에 질린 소대원들을 독려해 반격에 나서도록 했으나, 상부와의 통신이 두절된 데다 탄약마저 거의 다 떨어졌다. 크게 다친 헨리는 중대 결심을 했다. 소대원들에게 시켜 다급히 1인 진지를 구축하도록 하고 남은 탄약과 수류탄을 모두 그곳에 모았다. 헨리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소대장이 이곳에 남아 끝까지 적을 막을 테니 너희는 즉각 철수하라!”

그게 소대원들이 기억하는 헨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훗날 미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헨리는 탄약 소진으로 최후를 맞을 때까지 적군과 싸워 약 5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여러 정황상 헨리가 전사한 것은 분명했으나 그의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않았다. 처음엔 헨리를 ‘실종자’로 분류한 미 육군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1953년 12월 그에게 공식 사망 판정을 내렸다.

헨리는 사후에 대위로 1계급 특진을 한 데 이어 1951년 1월에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고인을 대신해 부인이 백악관에서 훈장을 받았다. 사후 75년이 되도록 귀환하지 못한 헨리의 이름은 오늘날 하와이 태평양 국립묘지에 세워진 실종자 명비에 새겨져 있다. 1960년 5월 주한미군은 대구에 있는 기지 한 곳을 ‘캠프 헨리’로 명명해 고인의 전공을 기림과 동시에 어서 가족과 고향 품으로 돌아오길 염원하고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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