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4월 과학저널 네이처(Nature)에 실린 단 한 페이지짜리 논문이 생명과학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며 생명체가 유전 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하는 원리를 찾아낸 것이다. 이 발견은 ‘생명은 정보로 구성된다’라는 인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70년, 인류는 이제 생명의 언어를 읽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전 정보의 저장과 복제, 발현과 조절을 정밀하게 이해하며 그 속에서 질병의 단서와 생명의 설계를 찾아낸다. 분석 기술의 발전도 눈부셨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의 유전체를 해독하는 데 13년의 기간과 수십억 달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몇 시간과 500달러면 충분하다.
유전자 흡사한 쌍둥이 20만 명
같은 암 발생할 확률은 38%뿐
의료 데이터 있어야 고도화 가능

의학 지식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1950년대에는 의학 지식이 두 배로 늘어나는 데 50년이 걸렸지만, 지금은 불과 60~70일이면 충분하다. 의학은 이제 정보의 폭증을 토대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학문이 되었다.
1990년대 전공의 시절, 생명과학의 발전에 고무된 교수님들로부터 “이제 암이나 당뇨병 같은 질병은 곧 극복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언론도 새로운 유전자가 발견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난치병 정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한 낙관을 쏟아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예측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유전자를 알면 병을 고칠 수 있다’라는 낙관은 어느덧 ‘유전 정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라는 성찰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쌍둥이 연구다. 2016년 스웨덴·덴마크·핀란드의 쌍둥이 20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일란성 쌍둥이 중 한 명이 암에 걸렸을 때 다른 쌍둥이도 암에 걸릴 확률은 평균 46%, 같은 종류의 암은 38%였다. 즉, 유전자가 거의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라도 절반 이상에서 암 발생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결과다.
이처럼 유전 정보를 안다고 해서 암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의 원인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첫째, 후성유전학적 변화로 인해 동일한 유전자라도 환경과 생활 습관에 따라 활성 수준이 달라진다. 둘째, 흡연·바이러스·자외선 같은 발암물질에의 노출이 암의 위험을 높인다. 셋째, 세포 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적 DNA 복제 오류 역시 유전이나 환경으로 설명되지 않는 제3의 변수로 작용한다. 결국 암은 유전과 환경 그리고 우연이 얽혀 생기는 복합적 질병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건강과 질병에 관한 정보가 유전자에 코딩되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유전자는 가능성을 제시할 뿐, 그 가능성이 실제로 드러날지는 환경과 삶의 방식에 달려 있다. 질병의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생활 습관의 변화로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예측하고 실현하려면 의학·유전·생활 습관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개인의 건강 상태를 정밀하게 해석하고 맞춤형 해법을 제시하려면, 강력한 컴퓨팅 파워와 데이터 과학의 역량이 필수다. 최근 인공지능(AI)과 의료·바이오 정보를 결합한 산업이 각국의 전략 분야로 부상하는 이유다.
핵심은 데이터다. AI는 데이터를 통해 학습하고 예측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료·바이오 데이터 환경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국민은 보험료와 검사비를 내지만, 자신의 의료 데이터를 직접 내려받거나 활용하기 어렵다. 정부가 ‘데이터 전송권’을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개인이 스스로 데이터를 활용할 실질적 권한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의료 데이터는 공공 정보이기 이전에 개인의 자산이자 권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최근 기업들의 의료 데이터 활용 요구가 늘고 있지만, 목적과 공익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5%가 보험사 등 금융기관에 의료 데이터를 제공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의료 데이터는 보험보다 정밀진단, 맞춤형 영양, 신약 개발 등 공공성과 혁신이 결합한 영역에서 더 큰 가치를 낳을 수 있다.
정밀의학은 생명과 질병을 ‘정보의 통합체’로 바라보며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데이터에 대한 개인의 권리와 사회적 신뢰가 있어야 한다. 변화를 현실로 이끌기 위해서 개인은 자신의 의료 정보를 숨기기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고, 기업과 의료기관은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혁신적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이를 뒷받침할 제도와 투명한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세 주체가 조화를 이룰 때 데이터와 과학은 인간의 건강과 삶을 향상하는 힘이 되며 AI 시대에 혁신과 산업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된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