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격동의 역사 현장에서 앞섰고 다쳤고, 다시 일어섰다 더불어민주당 울산광역시당 이선호 위원장

2025-01-03

정치인으로선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이기도 하고, 말도 어눌해서 대화하는 동안 조마조마하기도 한 이선호 위원장과 2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다. 통상 이 지면을 채우는 데에는 30분 정도면 충분함에도 그의 치열한 삶을 듣다 보니 카메라 배터리가 견디지 못했고 예정된 그의 일정 때문에 인터뷰를 중단하고 말았다. 분량은 엄청나게 많고 오프-더-레코드를 요청한 내용도 있었다. 한정된 지면으로 더 많은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지만, 정중한 그의 삶이 아주 작은 일부나마 전해지길 희망한다.

Q. 아들이 천재라는 소문을 들었다.

애가 어릴 때부터 내 어머니가 자주 아팠다. 애가 할머니를 참 좋아했는데, 할머니 아플 때마다 내가 할머니 병 고쳐 줄게, 의사 될게, 하더니 결국 의사가 됐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였나, 아들 담임이 날 불렀다. 지금도 키가 큰데 그때도 또래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컸던 애였고 굳이 아버지를 부르길래 아이고, 이거 사고 친 거 아닌가 싶어서 크게 긴장했다. 그땐 ‘쌕쌕’을 들고 갈 수 있던 때라서 두 상자를 사 들고 갔다. 여선생님이었는데 지금도 알고 지낸다.

교장과 담임이 하는 말이, 내 아들이 좀 이상하다고 했다. 수학 문제를 너무 잘 풀고 항상 100점을 받는다고 했다. 문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법대로 푸는 게 아니라 제 맘대로 공식을 만들어서 푼단다. 학원 보내냐 묻길래 안 보낸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하나만 보내세요, 그런다. 그래서 옥동의 어느 학원으로 갔다. 시험지를 풀어보라고 하더니 제일 수준 높은 반에 넣어줬다. 1년쯤 있다가 전국 올림피아드에서 대상인가를 받아왔다.

Q.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나?

생긴 것도 닮긴 했는데 이거 정말 내 아들 맞는구나, 하는 건 어딘가에 구속되는 걸 싫어한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자율학습을 하지 않나. 그게 싫다고 자율학습이 시작되면 학교를 나와버렸다. 성적이 잘 나오는 아이다 보니 학교에서 너 혼자 나가서 알아서 공부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독서실을 끊어줬다.

독서실 주인이 우리 아파트 주민인 걸 애가 대학 가고 난 뒤에 알게 됐다. 하루는 집 앞에서 이 양반을 만났는데 아들이 대학은 갔냐고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의 생명공학과에 붙고 다른 학교의 의대에 붙었는데 본인이 의대를 선택했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맨날 책 덮어 놓고 당구 치러 갔다는 거다. 그렇게 놀기만 하는 놈이 의대를 갔다니 놀랄 수밖에.

나도 당구를 제법 잘 쳤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300점을 쳤는데, 이 녀석도 고등학교 3학년 때 구력이 200점이었다. 공부는 안 하고 당구장에 붙어 살았다는 말이지. 그래도 성적이 나오는 걸 보면 제 나름대로 공부하는 방식이 따로 있었던 것 같다.

Q. 할머니는 손자가 의대를 가니 좋아했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무척 좋아했다. 나에 대한 미련이 손자로 풀렸잖나. 집에 아버지가 사진을 걸어놨는데, 가지도 않은 서울대 합격증을 붙여 놓고 그 옆에 의사 면허증을 붙여 놨다.

난 내 아들이 의대보다 수리·통계 쪽으로 가길 원했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경제와 관련된 일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이 녀석은 어릴 때부터 시종일관 의사만 고집했고 응급의학을 선택했다. 특이한 녀석이다. 지금 군의관으로 가 있는데, 이제 4개월 남았다.

Q. 아들이 군의관으로 가 있었다면 올해 의료 사태와 계엄 사태에서 걱정이 많았겠다.

이번 계엄이 선포되고 포고령이 발표됐을 때 난 아픈 데가 있어 병원에서 일 주일분 약을 받아 들고 나온 날이었다. 포고령은 정치 활동을 금지했지만 난 문자 메시지와 전화 통화로 의원들과 당직자들을 모았다. 포고령을 위반했지. 급하게 집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내 노트북과 핸드폰을 숨기라고 했다.

포고령에 의사들이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처단하라고도 돼 있었잖나. 우리 아들은 좋든 싫든 의사이면서 군인이니 계엄군 쪽이고. 그런데 며느리도 의사다. 위, 장, 간 등의 일반 내과 쪽. 자식 문제에 이길 방법이 없더라. 살려야지. 그래서 아들내미에게 전화했다. 우리 며느리, 빨리 병원 앞에 대기시키고 48시간 안에 다른 사람들 다 들어가면 마지막에 들어가라고 했다. 처단 대상이 되면 안 되니까.

계엄령 떨어진 다음 날, 국회 집회 때문에 나가려는데 아내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 죽겠다는 거다. 병원에 가자니 안 간단다. 아들내미한테 전화하려니 이 시국에 무슨 걱정을 끼치려는 거냐고 하지 말랬다. 전화했다. 증상을 들어보더니 심근경색 증상과 같다고 빨리 응급실로 가란다. 내가 데리고 갔다. 1차 검사를 한 뒤 서울로 급히 향했다. 국회 앞으로 갔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무슨 검사에 보호자 동의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그 시국에 당장 갈 수가 있나. 고민하다가 아들내미에게 전화했다. 하루만 휴가를 내라고.

여차저차 저녁에 다시 울산으로 내려왔고, 검사 결과는 다행히도 심근경색이 아니었다. 아내는 내가 어떻게 될까, 아들이 어떻게 될까, 며느리가 어떻게 될까, 밤새 고민을 했고, 그게 심근경색 같은 증상으로 나타났던 거다. 만 24시간 동안 나랏일도 집안일도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였다.

Q. 부인의 마음이 약한가?

평소엔 여린 편인 반면에 결정이 나면 단호하고 열정적이다. 예컨대 선거에 나가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도 출마가 결정되면 내가 하루에 만 보 걸을 때 아내는 4만 보씩 걷는다. 발바닥이 평발이 될 정도로.

Q.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

학교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회사가 현대자동차였다. 당시엔 노동조합이 없었다. 회사는 머리를 빡빡 깎지 않으면, 귀가 노출되지 않으면 출근을 못 하게 했다. 군인 같은 모습이어야 했다. 그런데 난 귀를 덮을 정도로 머리가 길었다. 못 들어가게 하더라. 그래서 아침 10시까지 정문에서 투쟁하다가 들어가곤 했다. 회사는 머리 기르는 나에게 난동이라고 했지만, 난 항의였다.

6.29선언 직전이었는데, 하루는 임원이 오더니 내 머리를 잡고 당겼다. 확 엎어버렸다. 회사는 나에게 잘릴래 나갈래, 했다. 결국은 내가 사표를 썼다. 당시엔 노동조합이 없었으니까 날 보호해 줄 노동자를 위한 울타리가 없었으니까. 백수가 된 거다.

며칠 뒤 할아버지 제사였다. 내가 우리 집안 14대 종손이라 꼭 참석해야 했다. 부산에 사는 둘째 고모가 스물여덟인데 결혼 안 하냐고 했다. 당시엔 스물여덟이 노총각 소리 듣던 시절이다. 직업도 없고 해서 결혼에 생각이 없다니 우리 집에서 살 여자는 이 여자밖에 없다며 선을 보라고 종용했다.

부산에서 만났다. 당시만 해도 핸드폰은 물론 집 전화도 없는 집이 많았고 ‘삐삐’도 없던 때였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다. 근데 누나가 이선호 어디서 차이고 다닌다며 심하게 놀렸다. 오기가 생겨서 회사 전화번호를 받아 연락하고 다시 봅시다, 그러곤 1년 있다가 결혼했다.

Q. 현대자동차에서 나온 뒤엔 무슨 일을 했나?

가족이 생기니 다시 취직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세대는 취업하기에 참 좋은 시절이었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으면 조금만 공부하면 됐다. 박정희가 통제경제를 추구했고, 그가 사망한 뒤 전두환 정권이 들어오면서 기업에 막아둔 쿼터들을 다 풀어준 거다. 그때 대기업들이 무서운 속도로 확장을 시도하게 되면서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크게 팽창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취직할 기회가 참 많았다.

SK, 당시 유공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뽑았고, 별 준비 없이 시험을 봤는데 딱 떨어졌다. 야,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성남동에 있는 어느 독서실에 들어가 6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며 시험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붙었다. 그런데 입사하자마자 얼마 후에 현대자동차 블랙-리스트가 유공에도 공유됐다. 당시는 요즘처럼 즉각 정보가 노출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사표 쓰라고 했다. 사표 쓸 수가 있나,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데. 노동조합 안 할게. 수습 기간에 그런 내용으로 각서를 세 번 썼다. 그렇지만 각서는 무효다. 노동조합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는 자체가 불법이거든. 수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노동조합에 바로 가입했다.

당시 유공의 노동조합 대의원은 주로 선배들 우선으로 죽죽죽죽 해왔다. 난 노조에 가입한 지 6개월도 채 안 돼서 대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노조원 수가 70명이었나 60명이었나, 당시 최고 고참과 막내인 내가 붙은 거다. 그런데 저쪽엔 세 표만 나왔고, 내가 압도적으로 이겼다.

Q. 대한석유공사의 줄임말인 유공은 국가에서 만든 기업 아닌가. 그런데 노조라니?

맞다. 유공 노조는 밭이 좋지 않았다. 돌밭이다. 아주 악산의 돌밭이었다. 유공은 대한민국 최초의 정유공장이다. 한국 50, 미국 50 지분으로 설립했다. 처음 지은 정유공장이니 이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런데 이익의 절반이 국외로 나가는 거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서 그런 말이 있었다. 미국으로 돈이 덜 나가게 하려면 노조를 만들어서 임금을 많이 주면 된다고 누군가 제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공에도 노조가 생겼고, 몇 대까지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동안 노조 위원장이 모두 군 출신이었다.

어쨌든 유공 임금은 다른 회사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유공 노조의 출발은 회사가 조직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 노조가 노동자의 편이 될 수 없었다. 1987년 울산 노동자 대투쟁 이후 유공 노조를 바로잡기 위해 유공노동자민주화추진위원회 즉, 유민추가 탄생했다.

1994년에 회사에서 기상천외한 걸 들고 나왔다. 정리해고. 그걸 노조에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발해 우리 집 거실에서 열한 명의 대의원이 도원결의로 유민추를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유인물을 만들어 회사에 갔더니 남은 사람은 여섯 명밖에 없었다. 다섯 명이 배신했다.

당시 준비했던 유인물을 회사는 불법 유인물로 규정했고, 배포하면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었다. 우리 여섯 명은 유인물을 몰래 이쪽저쪽 화장실에 가져다 놓고, 길목에도 뿌렸다. 유인물에는 어디 어디에 가져다주세요, 라고 써놨다.

촛불을 봐라. 앞에 나선 사람은 몇 안 됐지만 시민의 마음속 압력이 촛불로 분출되지 않았던가. 우리 회사도 그랬다. 열한 명 가운데 여섯 명만이 남았지만, 정리해고의 부당성에 대한 노동자의 압력이 불신임 투표에 72퍼센트 동의라는 결과를 이끌었다. 33퍼센트만 받아도 되는 거였는데.

Q. 그렇다면 유공의 노조는 노동자 중심으로 잘 결성되었는가?

유공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해에 월급을 두 번 올렸다. 그런데 우리 여섯 명만 아니면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였는데, 국가보안법으로 역대 제일 많이 잡혀들어간 때였다. 박노해 시인도 그때 들어갔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즉, 사노맹이 노조 쪽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고 우리도 간접적으로 연결됐었다. 이것으로 회사는 우리를 엄청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Q. 통상 회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회사가 당근과 채찍을 함께 제시한다.

회사가 나에게 제안한 것들이 많다. 회유. 상상도 하지 못할 제안들도 있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금전적인 엄청난 것들.

SK 노동자들은 빨간색 파이프렌치 하나씩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모든 공정 과정에서 파이프를 통통 두드려보며 판단하고, 유속을 가늠하고, 조이고 푸는 데 쓰는 손바닥만 한 걸 현장 직원들은 다 가지고 다닌다. 돈보다 그게 더 크게 보였다. 우리의 존재를 상징하는 그 파이프렌치를 들고 다니는 우리 동료들이 보여서 차마 회사의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채찍이 떨어졌다. 우리 여섯 명 가운데 두 명을 해고했다. 주동자인 난 출근 정지 몇 달을 받았다. 월급은 없었다. 밤 열두 시만 되면 집으로 협박 전화가 왔다. 네 아들 잘생겼네, 어느 유치원 다니던데, 이런 전화. 그래서 학원을 못 보냈던 거다.

출근 정지 받기 전에 1년 동안 인사부장과 마주 보고 있었다. 책상에 아무것도 없길래 컴퓨터는 달라고 했다. 어딜 가든 모두 보고하라고 해서 화장실 갈 때도 보고했다. 큰 목소리로 화장실 갔다 오겠습니다! 인사팀의 누구와 앉아 있어도 난 견딜 수 있었다. 당당하니까. 그런데 점심때만 되면 죽을 것만 같았다. 정말 가혹한 고문이었다.

밥은 먹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식당에 가면 난 투명 인간을 넘어서서 전염병 환자 같은 존재가 돼 있었다. 이선호는 사노맹이기 때문에 곧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간다. 조금이라도 가까이하면 너희도 같이 잡혀갈 것이다…. 내가 식판을 들고 가면 친구들과 동기들 모두 앉아 있다가 먹기를 멈추고 다 일어나 가버렸다. 한 명도 없이 모두 다. 내 고등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 시골의 친구들마저도 모두 다. 그러면 그 테이블에는 나 혼자 있는 거다. 아무도 없이. 이게 지금도 제일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난다. 그걸 2, 3년이나 버텨냈다. (목이 메어 잠시 인터뷰가 중지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난 위암 초기로 수술을 받아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했다.

Q. 위암이라니?

어느 날 속이 너무 아파서 부산의 어느 병원에 갔다. 만으로 마흔이었다. 조직검사를 한 1주일 뒤에 의사를 만났다. 의사가 종교가 뭐냐고 묻더니 할아버지 산소 잘 썼다며 초기 위암이라고 했다. “맹장 수술 완치율이 몇 퍼센트인 줄 압니까? 95퍼센트입니다. 5퍼센트는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이 날 수 있습니다. 초기 위암 완치율이 몇 퍼센트인지 아십니까? 95퍼센트입니다. 걱정말고 치료에 전념하세요.” 이랬다.

당시에 난 암이면 무조건 죽는 줄 알았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넘어오면서 이제 열 살도 안 된 15대 종손인 아들에게 이 무거운 삶의 짐을 넘기고 죽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때 회사에서 회유할 때 돈이라도 좀 받아 놓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곤 이내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Q. 도원결의했던 열한 명 가운데 배신한 다섯 명은 어떻게 됐나?

그들은 다 잘됐다. 한 명은 노조 위원장도 했고, 다들 좋은 자리에 가서 잘 먹고 잘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노조 활동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뿔뿔이 다 흩어졌다. 강원도로, 인천으로, 마산으로….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Q. 전염병 환자라도 보듯이 도망간 사람들 가운데 연락을 해 온 사람은 있나?

아무도 없다. 그런데 당시 그 친구들과 학교 동문회, 동창회, 동기회, 계중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주기적으로 만나지만 누구도 그때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때의 시간이 거세된 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우리 사이는 좋은 듯, 그냥 그렇게 지낸다. 가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허망해질 때가 있다. 그 이후로 잠을 네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엊저녁에도 그랬다. 진짜 잠을 여덟 시간 이상 푹 자보는 게 소원이다. 아내가 이런 내 모습 보는 걸 굉장히 힘들어한다.

Q. 현대자동차에서 머리카락 자르라는 데 반항했고, SK에서도 부조리에 반항했다. 그런 반항심과 실천하는 행동의 계기가 있었나?

아들과 진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내가 정치적으로는 진보가 맞다. 그러나 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보와 보수는 사회 전반으로 봐야 하는 것이지 정치적 진보만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난 14대 종손이고, 제사 지낼 때 지금도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쓰며 전통 방식으로 절한다. 종손이란 명분으로 제사 지낼 때 아무것도 안 한다. 난 어릴 때 열네 명의 대가족 안에서 자랐다. 내 남동생과 9년 터울인데,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난 황태자처럼 자랐다. 내가 밥을 안 먹으면 할아버지도 안 먹었다. 할아버지가 숟가락을 안 드니 아무도 식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집에서 내가 얼마나 보수적으로 자랐겠나.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누군가 모택동 평전을 줬다. 그걸 읽고 내 인생이 바뀐 거다. 내 삶은 보수였지만 정치적으로 진보가 된 계기다.

에피소드 하나를 말하자면, 입대하고 1981년 전두환 시절에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중대장이 민정당 고원준을 찍으라고 했다. 안 찍겠다고 버텼다. 그랬더니 심완구만 아니면 된다고 하길래 아래로 죽 보니 민주농민당 이규정이라고 있었다. 당명이 마음에 들어서 누군지도 모르고 찍었는데, 경남 최다득표로 그 사람이 당선됐다.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Q. 한참 힘든 시기에 딸과 아들이 어렸다. 아이들이 영향을 받았나?

아내가 언제나 내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과 사회의 어떤 고통도 모른 채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애들이 그늘 없이 컸다. 아내에게 정말 고맙다. 진심으로 고맙다.

Q. 마지막으로 울산저널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울산저널이 건강하고 더 크게 성장하길 바란다. 울산의 저널리즘, 한국의 저널리즘 변화에 기여하길 바라고, 합리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지형을 만드는 데 울산저널이 보탬을 주길 기대한다. 울산저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행이고 감사하다.

푸른 뱀의 해 2025년, 울산저널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민정 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