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회로 선폭이 3나노미터 시대를 맞이하고 배터리 주행거리가 양극재의 미세 구조로 결정되는 지금, 나노 기술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대한민국은 그래핀, 탄소나노튜브(CNT), 양자점 등 첨단 나노 소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과 '산업'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간극이 있다. 실험실에서는 성공했던 기술이 공장의 대량생산 라인에서는 실패하는 이른바 '죽음의 계곡'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AI)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도구로 등판한다. AI는 인간이 볼 수 없는 패턴을 읽어내고, 수만 번의 시행착오를 수백 번으로 단축하는 강력한 '디지털 가속기'다.
첫째, '우연한 발견'에 의존하던 소재 개발의 패러다임을 '데이터 기반 설계'로 바꾼다. 나노 소재 개발은 흔히 '모래사장 속에서 바늘 찾기'에 비유된다. 원하는 물성을 얻기 위한 분자의 조합, 합성 온도, 압력, 시간 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소재 개발 방식은 연구원의 직관에 의존하거나, 수없이 실험을 반복하는 '에디슨 방식'이었다.
하지만 AI 기반 '소재 인포매틱스'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다. 연구자가 원하는 물성을 입력하면,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분자 구조를 역으로 설계한다. 예컨대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위한 최적의 양자점 크기와 쉘 두께를 AI가 먼저 예측하면, 연구원은 AI가 추천한 상위 후보만 집중적으로 검증하면 된다. 이는 불필요한 실험을 줄여 연구개발(R&D)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물론 원천 특허를 선점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둘째, 소재 기업 최대 난제인 '스케일업'의 해법을 제시한다. 나노 소재 기업들이 가장 많이 좌절하는 구간은 '양산' 단계다. 실험실의 1리터 반응기에서는 완벽하게 합성됐던 나노 입자가 대형 생산 라인으로 옮겨지는 순간 응집하거나 입자 크기가 들쭉날쭉해지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AI와 디지털 트윈 기술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AI는 소규모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량 생산 환경을 가상 공간에 구현하고 변수를 예측한다. 시행착오 비용을 최소화하고 공장 가동 안정화 기간을 단축해 시장 진입을 앞당겨준다.
셋째, '균일도·재현성' 중심의 품질 관리(QC) 자동화를 실현한다. 나노 소재 품질 관리는 육안으로 할 수 없다. 나노 입자의 형상이나 분산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전자현미경 이미지를 분석해야 한다. 여기서 컴퓨터 비전 기술이 빛을 발한다.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학습된 AI는 SEM 이미지를 분석해 입자 크기 분포, 형상, 불순물 포함 여부를 정량화한다. 미세한 결함을 실시간으로 잡아내고 공정 엔지니어에게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국내 소재 기업들은 이제 구체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나노 소재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미래 산업의 쌀이다. 이 핵심 소재를 얼마나 빠르고 균일하고 저렴하게 생산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첫째, 공정 데이터의 체계적 수집과 표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장의 베테랑 엔지니어들이 보유한 암묵지를 데이터로 형식지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둘째, 대학·연구소와의 협업을 통해 AI 인재를 확보하고, 소규모 프로젝트부터 AI 도입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소재 기업의 데이터 구축과 AI 전환을 위한 실질적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공정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데이터로 정형화하고 AI를 접목한다면 한국의 소재 산업은 새로운 격차를 만들 수 있다. AI라는 현미경을 통해 더 깊이 들여다보고, 더 넓게 내다보는 기업만이 미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나준채 카이로스랩 대표 david@kailos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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