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사라지자 지워진 문명…이스터섬의 교훈

2024-10-15

영화와는 달랐던 라파누이 야자수의 운명

16세기의 어느날 태평양 한 외딴섬에 폴리네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섬에는 지배층인 긴 귀 부족과 피지배층으로 차별받는 짧은 귀 부족이 살고 있었다. 긴 귀 부족의 지도자 망구는 통합을 명분으로 섬의 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세우려고 한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눈치채셨을 것이다. 바로 이스터섬 이야기다. 짧은 귀 부족의 지도자 마토아는 석상을 세우는 데 필요한 나무가 부족하다면서 이 계획에 반대한다.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 사랑은 전쟁 중에도 꽃피는 법. 망구의 아들 투이와 마토아의 딸 라파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섬을 떠난다. 하지만 투이와 라파는 섬의 미래를 고민하다 부족을 화해시키고 섬의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섬으로 돌아와 두 부족을 설득하고 함께 섬을 발전시킨다. 해피엔딩!

세상에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 이것은 단지 1995년 개봉한 영화 <라파누이>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로는 석상을 세우는 데 썼던 라파누이 야자수(Paschalococos disperta)는 멸종하였으며 이스터섬의 문명도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석상을 둘러싼 미스터리뿐이다.

멸종은 어떤 종이나 개체군의 마지막 생존자가 죽었다는 뜻이다. 이런 과정은 자연적인 현상이며 지구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생존 중인 생명 종은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모든 종의 1%도 안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멸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대멸종(mass extinction)과 배경멸종(background extinction).

대멸종은 수만~수백만년에 걸친 비교적 짧은 순간에 발생하는 동시다발적인 멸종을 말한다. 이에 반해 배경멸종은 어떤 종의 형성과 멸종 주기에 따라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자연적으로 대체되는 사건이다. 대멸종은 대부분의 생물군을 없애고 생태계를 재편하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자연사에서 대멸종만으로 대부분 종의 소멸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지금까지 멸종된 생물종의 90%는 배경멸종을 통해 사라졌다.

과거의 멸종은 화석 기록을 통해 판단하지만 현대 멸종은 화석이 아니라 박물관에 보관된 표본으로 설명한다. 수집 당시에는 분명히 살아 있었지만 지금은 야생에서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다면 멸종한 것이다. 물론 쉽게 멸종을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 종의 존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한다. 그 종이 단지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말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장기간의 집중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 관찰되지 않거나 서식지가 현저하게 변경되고 파괴된 경우에만 멸종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류한다.

동물은 사라져도 이빨·뼈를 남기지만

식물의 경우엔 흔적도 없는 경우 많아

18세기 식물학 태동 후 약 1000종 멸종

양서류·조류·포유류 합계 훌쩍 넘겨

개발 명분으로 ‘녹색 유산’ 파괴 방치

식물 개체의 급감은 물론 멸종 가속화

산소·식량 공급하는 식물이 없어지면

인간을 비롯 모든 생명체는 멸망한다

‘멸종’이라는 단어를 듣고 연상되는 생물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은 공룡이나 도도새를 떠올릴 것이다. 식물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식물도 멸종한다. 그리고 동물 멸종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18세기 린네가 과학적 식물학을 개척한 이래로 약 1000종 미만의 식물이 멸종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것은 같은 기간에 멸종된 양서류, 조류, 포유류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수치다. 식물은 일반적인 배경 멸종 속도보다 최대 700배나 빠르게 사라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수치는 실제보다 매우 낮게 파악된 것이다.

포유류는 식물보다 훨씬 더 활발히 연구되고 있고 죽은 후에 이빨과 뼈 같은 증거를 남긴다. 이에 반해 식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멸종을 철학자 조지 버클리(1685~1753)의 이름을 따서 ‘버클리 멸종’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주변에 소리를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숲에서 쓰러지는 나무가 비명을 지를까?” 상당히 많은 식물의 멸종을 우리는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또 이미 ‘기능적 멸종’, 즉 살아 있기는 하지만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지 못해서 새로운 세대를 생산하지 않아 멸종할 운명에 처해 있는 식물도 있다.

그렇다면 언제 식물이 멸종되었다고 선언해야 할까? 어떤 식물 종이 영원히 사라졌다고 거의 확신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제한된 지역에서만 자라던 식물이 있는데 그 서식지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수십년 동안 그 종을 볼 수 없다면 멸종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식물이 자라던 유일한 장소가 도시 한복판이 되거나 댐 건설로 물속에 잠겼다면 그 종은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아히나히나(Argyroxiphium virescens)는 하와이 마우이섬에 살던 꽃식물이다. 국화과에 속하는 이 식물은 할레아칼라 분화구의 열대 산림과 고지대 관목 지대에 번생했다. 이 종은 1945년에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돼지와 염소를 과도하게 방목하면서 서식지가 파괴되었다. 동시에 외래 식물이 유입되어 경쟁을 해야 했다. 1989년에는 외래 식물과의 잡종이 목격된 적이 있지만 1945년 이후 순수한 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딱 한 번만 발견된 식물도 있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접근하지 못하거나, 식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사유지이거나, 지형이 험난해서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 사는 식물이다. 이런 식물들은 발견된 후에 채 연구되기도 전에 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반명이 채 지어지지도 않고 학명만 있는 ‘Vepris bali’는 카메룬의 발리 응젬바 삼림 보호구역에서 발견된 후 67년 동안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식물이 처음 발견될 무렵 이 종이 자라던 숲은 완전히 농경지로 바뀌어 있었다.

멸종 선언은 쉽지 않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아도 멸종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최소 50년을 기다린다. 멸종된 것으로 여겨진 종이 재발견되는 행복한 사건이 가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을 라자루스(Lazarus) 종이라고 한다.

2008년 마다가스카르의 한 농장에서 거대한 야자수 종(Tahina spectabilis)이 새로 발견됐다. 거대한 야자수도 새로 발견될 정도라면 이미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작은 허브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왜 없겠는가? 2013년 중국의 과학자들은 이미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어센션섬파슬리고사리(Gastoniella ascensionis)를 절벽에서 발견하고 다른 지역에 옮겨 재배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조건이 맞을 때만 잠깐 등장했다가 수십년 동안 보이지 않는 식물들도 있다. 그들의 씨앗은 땅속에 휴면 상태로 있으면서 싹을 틔우고 번식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엠블링기아(Emblingia calceoliflora)가 대표적인 예다. 서호주 사막에 들불이 난 후 충분한 비가 내리고 나면 등장하곤 한다. 이런 종은 기후변화에 취약하고 개체군 추세를 조사하기 어렵기 때문에 멸종되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라자루스 종 사례는 유감스럽게도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라파누이 야자수 멸종이 부른 비극

현재 멸종률이 정상보다 높은 이유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활동에 취약한 고유종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다. 따라서 현재의 멸종은 삼림 벌채와 토지 이용 변화로 인한 자연 서식지 상실 때문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라파누이>는 식물 멸종의 원인을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라파누이 야자수의 멸종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기후변화와 과도한 사냥과 채집이라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또는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라파누이 야자수의 멸종은 인류가 섬에 도착한 시기와 일치했다.

우리는 이스터섬이라고 하면 거대한 석상을 떠올리지만 그 석상을 세운 인간이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스터섬의 숲에는 라파누이 야자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야자수는 이스터섬의 지배종이었다. 라파누이 야자수는 새로 도착한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생물이었다. 전통적인 오두막은 야자수 잎으로 엮은 초가지붕으로 덮여 있었다. 론고롱고 문자에는 야자수 잎 모양의 문양이 등장하며 여성들은 야자수 잎으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치마를 입었다.

하지만 1774년 쿡 선장이 이스터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라파누이 야자수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야자수 줄기는 카누를 만드는 데뿐만 아니라 모아이 조각상을 채석장에서 옮기는 데 사용되었다. 마지막 나무가 잘릴 무렵에는 기근이 닥쳤고 전쟁이 일어났다. 사람과 함께 도착한 폴리네시아 쥐(Rattus exulans)도 한 요인이었다. 쥐는 야자수의 씨앗을 먹어 치워 야자수의 번식을 막았다.

나무가 점차 줄어들자 토양 침식이 증가하고 땅의 비옥도가 떨어졌다. 생태계가 쇠퇴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덩달아 섬 주민들은 농업 생산성이 낮아졌고, 심해 어업에 필요한 대형 카누를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어 식량을 공급하지 못했다. 라파누이 야자수의 멸종은 이스터섬 사회의 붕괴로 이어졌다.

식물 멸종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10년마다 70~80종의 식물이 사라졌다. 산림 벌채가 가속화되고 도시가 확장된 시기와 겹친다. 그 후 점차 멸종 속도가 줄어서 최근에는 10년에 10여종이 멸종하고 있다고 보고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최근 식물 멸종에 관한 연구 자체가 줄어서 기록되지 않고 있을 확률이 큰 것이다. 대부분의 멸종은 여전히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자연이 지속적으로 파괴되면서 식물 종의 40% 이상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대부분의 멸종은 생물다양성이 높은 지역, 소위 생물다양성 핫스폿에서 발생한다. 생물다양성이 높은 곳은 인간이 살기에도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생물다양성 핫스폿은 바로 멸종 핫스폿인 셈이다.

자연과 단절된 듯한 도심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식물의 멸종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 주제다. 하지만 식물은 우리가 숨 쉬는 산소와 우리가 먹는 음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뿌리와 줄기를 이루고 있다. 식물의 멸종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아주 나쁜 소식이다.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은 <식물의 사생활>(1995)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식물을 파괴합니다. 우리나 다른 어떤 동물도 그들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녹색 유산을 약탈하지 않고 소중히 여겨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식물이 없으면 우리는 분명히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자 이정모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맞고 있는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지속 가능하려면 지난 멸종 사건에서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연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했지만, 박사는 아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과학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대중의 과학화를 위한 저술과 강연,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과학이 가르쳐준 것들> <과학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살아 보니, 진화> <달력과 권력> <공생 멸종 진화>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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