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연말이면 잡지나 가계부 부록으로 나온 토정비결을 보곤 했다. 토정비결의 풀이에 따라 다가올 해의 행운에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하고 ‘조심하라’는 문구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불행이건 행운이건 그걸 받아들이고 마주하는 힘은 내가 내 자신을 믿고 다독여주고 자신과 주변에 감사하는 마음이란 것을. 60여년의 삶, 30여년의 직장생활 동안 산전수전·시가전·공중전까지 많은 전쟁을 겪었다. 내 경우, 인생이란 전쟁에서 버티는 힘은 무기나 전술이 아니었다. 포탄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내가 내 귀에 들려주는 긍정의 주문이었다.
20여년 전 한 역술가가 내 사주를 보더니 ‘사주가 크고 단단한 아름드리 나무라 남들이 흔들어도 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고 풀이해줬다.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마치 혈액형을 파악한 듯 내 본질(?)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힘든 일이나 오해를 받을 때 ‘난 큰 나무야. 아무리 날 괴롭혀도 날 쓰러뜨릴 수 없어’란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 주문은 내 마음과 몸에 방탄복을 입혀주는 효력을 발휘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확실한 사건이나 특정 사람이 아니라 근거 없는 근심·공포·불안이다. ‘희망고문’이란 말이 있듯 막연한 희망이 때론 낭패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심신을 피폐시키는 걱정보다는 낫다.
오래전 본 인도 영화 ‘세 얼간이(3 Idiots)’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고 난 긍정 주문의 힘을 더욱 확신했다.
“넌 너무 걱정이 많아. 자주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 알이즈웰(All is well). 사람의 마음은 쉽게 겁먹어. 겁쟁이라고. 그래서 속여줄 필요가 있어.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다면 한번 쉽게 속여봐. 마음은 바보라 주문에 매혹될 거야. 입술을 모으고 휘파람을 불면서 외쳐봐, 알이즈웰!”
때로는 철학자나 현자의 명언보다 이런 얼간이의 주문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문제나 현실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과 싸우거나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다 주저앉는 대신에 직접 마주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반가워요. 그런데 당신들에게 휘둘리고 무너지기엔 난 강하고 소중한 존재랍니다. 내가 날 지키고 버틸 힘이 있거든요. 난 다 잘될 사람이니까요.”
신의 가호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축복하는 말과 마음도 필요하다. 1960년대 팝송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란 노래도 자주 흥얼거린다. 케세라세라는 스페인어로 ‘될 대로 되라’란 말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하란 의미다. 후회와 불안으로 끙끙거리던 어린 내게 엄마가 불러주던 다정한 자장가처럼 내가 내게 마법의 주문을 속삭여준다. 새해에도 난 잘될 거야. 내가 날 믿으니까.
유인경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