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리

2024-09-19

윤정인 수필가

가을꽃이 한창이다. 들에는 억새꽃과 개여뀌 고마리가, 산에는 산국과 쑥부쟁이 구절초가 흐드러졌다. 산책하던 중에 황금빛 마타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 노랗게 양산같이 생긴 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설 ‘소나기’에서 마타리는 소심한 산골소년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얼굴이 흰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 해 보이며 상기된 얼굴에 보조개까지 패인다. 소년은 싱싱한 꽃가지를 새로 꺾어 소녀에게 건넸다. 인상적이었던 이 장면 때문에 마타리꽃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마타리가 가을바람에 낭창한 허리를 굽혔다 펴는 모습은 애잔한 여인의 자태를 닮았다. 훤칠한 꽃대는 사람 키만 하고 여랑화(女郞花)라 불리며 ‘아름다운 여인’이란 꽃말이 있다. 유럽 이중스파이 영화 ‘마타하리’와 발음이 비슷하나 순 우리말이다.

마타리꽃을 보면 시숙모님 생각이 난다. 갸름한 얼굴에 목선이 길고 어깨가 좁아 미색 한복을 입으면 꼭 마타리꽃 같았다. 그녀는 모델을 하다 시삼촌과 결혼해서 손에 물 안 묻히고 살았다. 시삼촌은 평사원으로 시작해서 회사 대표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여 자수성가했다.

마타리가 필 때면 생김새가 같은 뚝갈이라는 흰 꽃도 핀다. 뚝갈은 줄기에 거친 털이 있어 훨씬 억세다. 뚝갈이 무뚝뚝한 나의 시어머니 같다면 시숙모는 부러질 듯 연약한 마타리다.

시어머니는 서른쯤에 혼자되어 오남매를 키웠다. 장수했던 시할아버지를 모시고 농사일까지 하느라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곤고한 생을 살아서인지 웃음기란 없고 늘 굳은 표정이었다. 두툼한 돈 봉투를 내미는 것으로 힘든 일엔 쏙 빠져나가는 아랫동서를 곱게 보지 않았다.

명절이면 시숙모가 오길 기다렸다. 시어머니가 숨 막히고 어려웠던 반면 시숙모는 다정해서 마음이 편했다. 대화도 스스럼없었다. 어머님은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차갑게 쳐다보다, 둘 다 철딱서니 없다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시숙부는 유리그릇회사의 대표였을 때 파산했다. 자금난에 빠진 회사를 살리려고 사채까지 빌리고는 감당 못하게 되자 야반도주했다. 그 후로 추석이면 낯선 사람들이 시댁 골목 입구를 서성거렸다. 시숙부의 고향 방문을 노린 채권자들이었다.

미국으로 간 시숙모는 네일 기술을 배워 이방인들의 손톱을 다듬어주며 난생 처음 돈을 벌었다. 석면 제거하는 노동자로 전락한 시숙부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했다. 고된 타국살이에 뇌졸중을 겪고는 후유증까지 생겼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에서 그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마타리 뿌리는 간장 썩는 냄새가 난다. 수분(受粉)을 위해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서다. 아름다운 꽃에 향기까지 좋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사람도 다 갖춘 이가 있으랴. 흠 없이 살려다 따뜻한 인정을 잃고는 인향(人香)이 부족해지기도 한다. 조금 허술한 사람을 보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경계를 풀고 말이 많아지는 습관이 있다.

빈틈없었던 어머님에 비해 시숙모는 사람냄새 풍기는 틈을 보여주었다. 나도 부족함이 많아서 그니에게 동질감을 느껴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이번 추석에는 시숙모께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산책길에 꺾어 온 마타리를 꽃병에 꽂았다. 어둑했던 거실이 노랑으로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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