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무역대표부에 접수된 의견 보니…30개월령 이상 쇠고기 등 포함
LMO법 개정 요구도…전문가 “실제 관심은 농산물이 아닐 가능성 커”

[주간경향] 통상 교섭을 담당하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지난 2월 20일~3월 11일(현지시간) 미국 내 개인, 업계, 협회 등으로부터 ‘불공정 무역 관행으로 인한 피해’ 의견을 접수했다. 피해를 준 국가, 피해 추정액 등도 적시하도록 했다. 민간의 요구사항을 받아 교역국을 압박하고, 오는 4월 2일 발표하는 국가별 상호관세율을 매기는 데에 활용하겠다는 취지다.
접수된 의견만 756건에 달한다. 중복으로 접수된 의견도 많고, “모든 나라가 미국의 산업을 죽이고 있다”며 엉성한 의견을 낸 이들도 있지만, 기업이나 협회가 별도의 문서를 첨부해 접수한 의견도 상당수다. 일부는 ‘킹앤드스팔딩(King & Spalding)’ 같은 대형 로펌을 통해 비공개(confidential) 의견을 냈다. 미국 무역대표부의 수장인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는 얼마 전까지 킹앤드스팔딩의 대표 변호사로 활동했다.
미 농업계 “한국은 불공정 무역국”
접수 마감 날, 한국에서는 전미쇠고기생산자협회(NCBA)가 미국 무역대표부에 한국의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수입 금지 규정’을 풀어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3월 14일(현지시간)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를 면담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한국의 농산물 시장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현지에서 특파원 간담회를 열고 “농업 부문의 위생검역조치(SPS)에 관해 한국이 시정할 점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농업에 관해 광범위한 언급은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쇠고기 문제를 얘기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시장과 관련해 미국 농축산업계가 트럼프 정부에 요청한 사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주간경향이 무역대표부의 의견 접수창 내용을 분석해보니, 전미쇠고기생산자협회 외에도 북서부 원예협의회(NHC), 미국 생명공학산업협회(BIO), 미국대두협회(ASA)·미국대두수출협회(USSEC), 미국쌀협회(USA rice) 등이 한국을 불공정 무역국으로 적시했다. 관련 품목은 쇠고기, 사과, 유전자변형생물체(LMO), 대두, 쌀 등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미국산 농축산물의 관세가 사실상 2%도 안 되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한국에 어떤 압박을 해올까.
‘30개월 쇠고기 연령 제한’ 과연 풀릴까
한국에 들어오는 미국산 쇠고기는 30개월령 미만의 뼈 없는 쇠고기다. 광우병(BSE) 발병 우려 탓에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권고 기준을 따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30개월령 제한 등을 해제하려고 했다가 대규모 시위 등 거센 저항에 부딪힌 바 있다.
전미쇠고기생산자협회는 “30개월령 제한이 한국에서 민감한 문제임을 인식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사안”이라며 “중국, 일본, 대만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품질을 인정해 30개월 제한을 해제했다. 한국과 협의해 연령 제한을 철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무역대표부도 매년 발행하는 ‘무역장벽 보고서(NTE)’에서 한국의 30개월령 쇠고기 제한은 ‘과도기적 조치(transitional measure)’라며 이 문제를 거론한다. 하지만 한·미 쇠고기 협상 당시 양국 사이에 오간 서한을 보면 ‘과도기적 조치’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2008년 6월 25일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 수잔 슈와브 대표가 한국 측에 보낸 서한에는 “한국 소비자들의 신뢰가 생길 때까지(Until Korean consumer confidence in U.S. beef improves)” 30개월령 제한을 유지한다는 표현이 있다. 전미쇠고기생산자협회는 “한국에서 미국산 쇠고기 판매가 증가한 것이 소비자 신뢰도가 크게 향상됐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지만, 아직까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한국 소비자들의 신뢰가 생겼다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의 최대 시장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22억2000만달러어치를 팔았다. 그 뒤를 일본(18억7000만달러), 중국(15억8000만달러), 멕시코(13억5000만달러), 캐나다(9억달러) 등이 잇는다. 미국 정부가 30개월령 제한 폐지를 한국 정부에 요구할 경우, 소비자 반발로 미국산 쇠고기의 판매량이 줄어들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수입산 쇠고기 시장에서 미국산(48%) 다음으로 점유율이 높은 호주산(44%)이 미국산 쇠고기를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서진교 GS&J 인스티튜트 원장은 “2008년에 미국이 한 번 크게 당하지 않았나. 미국 정부가 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 얼마 안 되는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팔겠다고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만 이걸 지렛대 삼아 다른 것을 받아내는 쪽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사과·배·체리의 주산지인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농가들이 모인 북서부 원예협의회는 미국 무역대표부에 보낸 의견서에서 “한국은 미국산 사과와 배의 수입을 금지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미국으로 배를 수출한다”며 “특히 사과는 1980년대부터 한국 시장 접근을 모색해왔지만, 한국 정부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거부해왔다”고 주장했다.
사과와 배를 언급하긴 했지만, 이들의 진짜 목적은 ‘한국으로의 사과 수출’에 있다. 미국산 사과는 한국에서 재배하는 부사(후지) 등 종류가 다양하다. 한·미 FTA로 미국산 사과의 관세도 대부분 철폐됐고, 부사의 관세도 2031년 0%가 된다. 그럼에도 한국에 미국산 사과가 들어오지 못하는 건 ‘검역’ 때문이다.
사과 같은 과실류는 수입을 하면 세균, 바이러스, 초파리 같은 병충해가 같이 유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검역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다. 세계무역기구(WTO) 등에서도 병충해로 자국의 농업 기반을 해칠 수 있는 품목에 대해서는 ‘검역 주권’을 인정해 8단계에 걸쳐 ‘수입위험분석’ 절차를 밟도록 한다. 현재 미국, 일본, 독일 등 11개국이 한국으로 사과를 수출하겠다며 수입위험분석을 진행 중이다. 미국산 사과는 2단계 과정에 있다. 특히 사과는 국내에 사과 농가가 많기 때문에 검역 절차가 더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과실류 중에서 한국 정부의 검역을 통과한 건 파인애플, 두리안, 석류, 레몬, 포도 등이다. 포도를 빼고는 대부분 국내에서 재배하지 않아 병충해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과일들이다.
한편, 세계 최대 종자업체인 몬산토와 모기업인 바이엘 등을 회원사로 둔 미국 생명공학산업협회도 한국을 ‘불공정 무역국’으로 지칭했다. 협회는 의견서에서 “한국에서는 ‘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 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LMO법)’에 따라 총 5개 기관이 중복으로 LMO 승인 여부를 검토한다. 이들 기관의 경쟁으로 한국은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하지 않는, 위험과 관련 없는 실험 등을 요구한다. 한국에서 승인받기란 매우 예측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의견서에는 한국의 LMO법 개정 요구도 담겼다. 이 단체의 회원사인 심플로트는 최근 농촌진흥청으로부터 LMO 감자 적합 판정을 받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 심사만 남겨두고 있다.

미국대두협회와 미국대두수출협회도 공동으로 작성한 의견서에서 “한국의 생명공학 규제 시스템은 미국산 농산물 수출에 계속해서 도전 과제를 주고 있다. 중복된 검토와 자료 요청으로 승인 절차가 길고 까다롭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국은 생명공학 작물과 그 가공제품을 식품 및 사료용으로 수입하지만, 재배용으로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이 LMO 대두에 대한 승인을 확대하고 수입을 늘리도록 미국 정부가 압박해 달라는 요구다.
이외에도 미국쌀협회는 한국 정부의 ‘최대 농약 잔류 허용량(MRL)’ 규제를 문제로 지적했다. 미국산 쌀을 경매하는 공공기관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대해서도 “경매가 열리는 횟수가 일관성이 없다. 일반적으로 1년 이상 지연돼 오래되고 품질이 저하된 미국산 쌀이 경매로 나온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실질적인 관심사를 파악해야
미국 무역대표부에 한국 농축산물 시장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접수됐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의 실제 관심은 농산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농축산물의 경우 한·미 FTA로 미국이 이미 압도적인 이익을 보고 있다”며 “농업 분야에 대해서는 미국이 한국에 요구할 것이 많지 않다. 트럼프 요구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진교 원장도 “이 의견들이 모두 미국의 실질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미 정부가 업계에 의견을 내놓으라고 하니 이것저것 다 집어넣어 의견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농업 분야만 놓고 보면, LMO 승인을 확대해 달라는 요구 정도가 미국의 ‘실질적인 관심사’와 부합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정부가 농업과 비농업 분야 전반에서 미국의 실질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현장을 훑고 다니면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미국 무역대표부에 제출된 의견에는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접수됐다. 미국농업연맹(AFBF)은 “캐나다, 멕시코, 중국 등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이들 지역으로 수출하는 미국 농산물에 대한 보복 위험을 초래한다”며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갈 곳을 잃은 미국산 농산물이 한국으로 향할 가능성도 있다. 서진교 원장은 “멕시코, 캐나다, 중국으로의 농산물 수출이 감소함에 따라 대체 수출시장으로서 구매력을 가진 한국이나 일본 등에 미국의 농산물 수입 압력이 거세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