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첫눈

2026-01-05

이영운, 시인·수필가 

새벽 4시 관음사 등산로에 이르렀다. 밤새 내린 첫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노루가 밤새 지키다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하다. 한 젊은이가 거친 발자국을 남기며 등산로 초입에 들어선다.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나요?”

“아, 예! 사실은 벌써 네 시간 반 동안 이미 산행 중입니다. 어제 늦게 대구에서 제주도로 내려와서 12시 반에 산지천 포인트 제로에서 출발해 지금 이 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한라산 등정을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알피니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지리산, 태백산 등 한국 굴지의 명산을 해발 포인트 제로에서 시작해서 등정해 온 전문 산악인이었다.

‘제로 포인트 트레일’(zero point trail)은 한라산을 오르는 새로운 방법이다. 해발 0m 지점에서 출발해 어떤 동력의 도움도 없이 오직 참가자의 두 다리로 걷거나 달려서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무동력 트레킹(Sea to Summit, Zero to Summit) 챌린지다. 한라산의 경우 일반적으로 산지천 용진교에서 시작해 제주시청 도로원표, 남국사 일주문, 신비의 도로 표지판, 관음사 탐방로 입구, 삼각봉 대피소, 한라산 정상 백록담, 성판악 탐방로 입구로 하산하게 된다. 관련업체의 게시판에 완주 인증 게시물을 업로드하면 완주인증 명판 메달 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통성명도 못 한 그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안전 산행을 기원해 줬다.

산속에서의 첫눈은 특별한 의미와 경관이 있다. 잎새 잃은 수많은 나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소복소복 쌓이고 있는 눈을 지켜보는 것들은 겨울 나기를 걱정하는 새와 들짐승들일 것이다. 또 올해 처음으로 태어나 눈 세상을 경험하는 노루 같은 어린 생명들은 어떤 경이와 두려움 속에 신비로운 세상을 맞고 있기도 할 것이다.

첫눈이 내리면 항상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실화다. 첫눈이 내리는 날 여교사는 경복궁으로 눈 구경을 갔다. 그 곳에서 마침 휴가를 즐기려 나왔던 한 장교를 만났다. 너무도 아쉬워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장교와 서울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여교사는 다음 해 첫눈이 내리는 날 경복궁의 그 벤치에서 처음 본 시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겨울이 오자 첫눈 내리는 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중요한 일상이 됐다. 드디어 첫 눈이 펑펑 쏟아졌다. 경복궁을 찾아 땅거미가 지도록 기다렸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선엔 눈이 오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다. 다음 해 다시 첫눈이 오는 날 그녀는 혹시나 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군용 지프 차량이 도착했다. 그런데 낯선 군인이 거수경례를 하며 장교님을 기다리시냐고 물었고, 한 가지 알려드릴 일이 있다고 했다. 사실은 지난해 장교님이 선생님을 만나러 서울로 출발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는 도중 군용차가 눈길에 전복돼 생을 달리하게 됐다고 했다. 이 만남을 잘 알고 있던 그는, 혹시 올해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 알려주러 왔다는 것이다. 첫눈은 참으로 가슴 저린 얘기도 담고 있다.

첫눈과 만남에 대한 얘기는 너무도 많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눈이 내리는 날 교정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가장 많을 것이요. 친한 몇 몇 친구들은 기차역이나 광장이나 공원에서 만나자고 크게 외치고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SNS가 일상화된 시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수많은 세월을 비켜왔는데도, 오늘도 또 첫눈을 보며 가슴이 갑자기 벅차오르고 포근한 눈송이에 시린 눈을 떼지 못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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