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를 양분 삼은 뇌, 극단으로 기운다

2025-04-17

뇌의 요구 충족시키는 이데올로기

세상에 대한 해석·소속감 등 제공

확실성 주나 반박·의문 허용 안 해

정치 넘어 생물학적 과정이기도

전전두엽 피질, 급진주의와 관련

평소에는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왜 특정 정치 신념이나 종교에 사로잡히면 극단으로 치닫는 걸까. 한국인들이 최근 몇달 동안 한번쯤 품었을 법한 생각이다. 영국의 신경과학자 레오르 즈미그로드는 2015년 영국의 어린 소녀들이 극단주의 이슬람 조직 ISIS에 가담하기 위해 시리아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소녀들이 왜 저러는 걸까.’ 즈미그로드가 보기에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문화적 요인으로만 소녀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한 것 같았다.

이데올로기 브레인

레오르 즈미그로드 지음 | 김아림 옮김

어크로스 | 380쪽 | 2만2000원

<이데올로기 브레인>은 즈미그로드가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의 방법론을 활용해 이데올로기적 사고의 기원과 결과를 연구한” 책이다. 책에서 저자는 어원까지 따져가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지만, 이데올로기를 ‘극단적 신념 체계’라고만 이해해도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령 “보수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유신론, 포퓰리즘” 같은 ‘주의’들이 다 이데올로기다.

인간은 왜 이데올로기에 취약할까. 저자는 뇌가 원하는 것을 이데올로기가 제공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뇌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정확한 예측을 필요로 한다. 또한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세상을 분석하는 힘든 일을 하는 대가로 타인의 인정을 바란다.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예측 가능성과 타인의 인정이라는 뇌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주는 “군침 도는 해답”이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에 대해 일관된 해석을 제시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소속감을 제공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따를 대본, 우리가 속할 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한다. 생각과 행동을 안내하는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이해하고, 다시 나 자신도 이해받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충족해주는 빠른 지름길이다.”

이데올로기는 확실성을 제공하지만, 경직된 교리처럼 반박과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독단에 빠진 사람은 반대 의견이나 모순을 처단하려고 하며, 반대되는 증거가 나와도 신념을 바꾸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근거 없는 지적 오만도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의 특징이다. “이들은 자신이 진실에 대한 특별한 접근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희귀한 예언자적 지능을 타고난 덕분에, 깊은 철학적 고찰과 과학적 탐구를 거쳤기 때문에, 아니면 올바른 가족이나 종교 또는 정치 집단에 속하는 특별한 행운 덕분에, 이들은 자신이 진실을 인지하고 전달하는 독보적 위치에 서 있다고 여긴다.”

이데올로기는 소속감을 제공하지만, 집단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적으로 돌린다.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들은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은 ‘가족’으로 여기는 반면, 외부자들이라고 생각되면 불신과 차별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취약한 건 아니다. 저자는 1940년대에 이뤄진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엘제 프렌켈-브룬즈비크의 실험을 소개한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브룬즈비크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광범위한 인터뷰를 수행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아이들은 따뜻한 성품을 지닌 교사가 이상적이라고 봤지만, 권위주의 성향이 강한 아이들은 교실에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자신들을 “규제하고 구속해달라고 애걸복걸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인지과학자들에 따르면 경직된 인지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데올로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말해 창의적인 상상력이 부족할수록,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할수록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공산이 크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좌파냐 우파냐 하는 것보다는 인지적으로 유연한 사람인가 아닌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극우 운동가와 극좌 운동가는 차이점보다 비슷한 점이 더 많을 수 있다.

뇌과학자들은 우리의 앞이마에 가까운 뇌의 전전두엽 피질이 보수주의 또는 급진주의의 수준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내놨다. 전전두엽 피질이 손상되면 정치적·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또 독단적인 사람일수록 시각이나 청각 등 감각 정보를 통합하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저자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에 한번 세뇌당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이데올로기에 빠지면 “개인이 분명하게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은 신념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인지, 본능적인 반응, 생리, 뇌 전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극좌에서 극우로, 또는 그 반대로 정치적 신념이 변화한 사람들의 행동 양태는 이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강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적 의존이 심화된 나머지, “하나의 열정에서 다른 열정으로”(에릭 호퍼) 별다른 혼란 없이 옮겨가는 것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특정 집단이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분명한 과학적 이유가 있다고 알려준다. 미국의 한 연구팀은 재정적 어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백인 참가자들이 흑인에 대해 인종차별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유가 놀랍다.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다는 인식이 백인 참가자들의 신경학적 얼굴 인식 메커니즘에 영향을 끼쳐, 흑인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로 인식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이들이 백인의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인종, 불평등, 사회적 계층 질서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정치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나아가 누군가의 얼굴을 사람 얼굴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뇌의 가장 근본적인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스며들 수 있다. 차별과 비인간화는 신체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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