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트럼프 집권 후 발생한 미국의 대내외적 정책 변화는 일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근본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삼권분립이라는 미국 민주주의의 공식을 흔들었다. 행정권력은 강화되고 권력은 트럼프에 집중됐다. 자유주의의 주요 기제인 제도는 약화됐다. 노골적인 미국 중심·일방주의적인 형태로 관세를 통한 보호무역주의를 대외관계의 핵심 수단으로 삼았다. 외교 분야에서는 이념과 가치를 탈각시키고 거래주의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주도했다. 그 파장은 엄청나다.
세계 주요국들에 중국 내 시장에서의 경쟁은 이미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이는 중국의 권위주의적 행태보다도 경쟁력에서 이미 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각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시장이란 변수에 더 취약해졌다.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제안하는 관세의 틀에 무기력하게 이끌려 간 연유이다.
전통적 의미의 동맹은 무색해졌다. 트럼프에게 동맹은 안보상 필수불가결하기보다는 미국의 현 이익에 봉사하는 수준만큼만 중요하다. 동맹에 기반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대외정책을 포기하고, 거래 기반 다극 체제를 수용해 강대국들 간의 거래로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려 한다. 동맹은 미국의 이익에 과도한 비용을 초래하는 부담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관세 압박은 동맹국들에 오히려 더 집중됐다. 미국이라는 자유주의적 패권국가 체제에 안주하던 서구와 미국의 동맹들은 2026년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엄청난 불안을 마주하고 있다.
미 안보 전략은 ‘유연한 현실주의’
미국과 중국은 자유주의적 방식보다는 정치 현실주의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전제하고, 국가의 중심성을 강화하면서, 독자 생존을 모색하는 길이다. 세계화나 국제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의 공간은 크게 축소되었다. 미국의 이익은 자국 군사력에 기반해 강대국 간의 거래를 통해 지켜내는 것이다. 2025년 말 발간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는 새로운 정책 정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중국을 가장 견제하면서도 군사적 충돌보다는 거래를 통해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 서구 동맹들과 나토는 저평가됐다. 힘의 현실에 부합하게, 미국과 미주 대륙 방어 위주의 사고를 드러냈다. 이를 “유연한 현실주의(Flexible Realism)”라 명명했다.
중국은 2013년 시진핑이 집권하면서부터 미국과의 중장기적 갈등과 경쟁을 전제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제시한 ‘중국제조 2025’는 그 단초였다. 미국의 무역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한때 70%에 달했던 GDP 대비 무역의존도는 이제 20%대 초반까지 낮췄다. 자급자족형 국가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중앙당교 연설에서 미·중 전략경쟁이 장기간 수행하는 장기전쟁의 형태라 규정한 바 있다. 상부구조 영역에서 미국과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충돌 영역을 경제 분야로 집중하고, 국제적 세 결집을 통해 미국을 위축시키고자 한다.
대외적으로는 “공동체”론을 제시하면서 인류와 지역사회에 소프트파워 분야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 실천 방안으로 발전, 안보, 문명 구상에 이어 2025년 세계 거버넌스 구상까지 제시했다. 미국 우선주의로 회귀하는 트럼프의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마치 옌쉐퉁 칭화대 교수가 제안한 “도의적 현실주의(Moral Realism)”와 상통하는 듯하다. 그는 중국이 미국식 패도정치, 제국주의적 강권정치를 넘어 왕도정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노골적인 힘의 대결보다는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구축해 미국과의 차별성을 강화하고, 미국을 우회·포위한다는 계획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중 모두에게서 존재하는 공통분모이다. 우선, 이념·가치 대신 국익 중심이라는 점이다. 자유주의적인 국제주의에 대해 부정적이다. 다음으로 리더십의 결정적인 역할을 신봉한다. 강력한 리더에 대한 트럼프의 찬사는 널리 알려진 바다. 실질적인 국가의 힘과 위상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를 채택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외부인에게 미·중관계를 혼란스럽게 보는 단초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미·중은 여전히 체제의 생존을 걸고 총력전 체제를 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냉전 구도’ 강화는 피해야
“유연한 현실주의”와 “도의적 현실주의”가 충돌하는 2026년 미·중관계는 서로의 필요에 의한 일시적 휴전과 체제 생존을 건 지속적인 전략적 충돌이 공존하는 세계다. 4월에는 트럼프의 방중 계획, 11월에는 트럼프 정책의 운명을 건 미국 중간선거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국은 2026년부터 제15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다. 시진핑 주석의 신년사를 보면 (전략경쟁에도 불구하고) 거침없는 중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026년이 미·중은 갈등하지만 군사적 충돌은 회피, 규범 없는 경쟁, 거래의 불안정성에 입각한 시대로 진입할 것임을 예고한다. 군비경쟁, 기술패권 경쟁, 관세전쟁 일상화, 공급망 분절의 확대 추세가 계속될 것이다. 국제질서는 거래 기반 다극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중국의 외교·무역 방면에서의 세계적 영향력은 더 확대될 것이다. 대서양 동맹의 약화는 현실이 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미·중 사이에서 헤징을 계속할 것이다.
한국이 당면한 위기는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 경제 공급망의 재조정, 북·러 동맹과 북한의 핵미사일 등 안보 위협 강화, 동북아 정세의 냉전장화 등 구조적인 측면에서 연유한다. 한국 자체 역량만으로는 해소하기 어렵다. 한국은 대중 전선의 첨병 역할을 강화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한국은 중견국이자 “낀” 국가이고, 분단국가·통상국가다. 북·중·러 vs 한·미·일 냉전 구도를 강화하는 것은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제약하고, 생존에 대한 위협까지도 초래한다. 이재명표 외교가 개인의 선호나 이상을 넘어 현실주의적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부합한다. 4일부터 시작되는 중국 국빈방문이 구조적 제약으로 뒤엉킨 한·중 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평화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으면 한다. 글로벌하고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일본 및 미국과도 전략적 논의와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에 쟁(爭)보다 화(和)가 더 소중한 가치이자 국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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