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의 사이에…, 제주의 아픈 흔적들

2025-04-03

흑백사진은 단순히 흑과 백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의 사이에는 무수한 다름이 있다. 우리는 점점 옅어지고 점점 짙어지는 것이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어느 시기나 이 사회에 흑과 백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77년 전에도 그랬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 생각하는 무리가 있었다. 하필 그 무리에겐 총과 칼을 휘두를 권력이 있었다. 그 권력은 제주도에 피의 광풍을 일으켰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에선 당시 섬 인구의 10분의 1인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일이 벌어졌다.

1947년 3월 1일, 제주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 행사 중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항의가 커지자 미국 군정과 경찰은 강경 대응에 나섰고,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가 1948년 4월 3일 발생했다. 정부는 이 봉기를 ‘공산 폭동’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투입되어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특히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는 ‘무조건 사살’ 명령이 내려져 많은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됐다.

제77주년 제주 4.3 사건을 앞두고 아직도 남아있는 당시의 학살 현장과 무덤을 돌아봤다.

1. 제주공항 활주로

제주공항 활주로는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미리 검거하는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양민들의 학살터였다. 2007년부터 2009년에 걸쳐서는 제주국제공항에서 388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지금은 제주 유일의 공항이기에 발굴 조사가 어려운 상황이다.

2. 섯알오름 학살터와 백조일손

1954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미리 잡아둔 예비검속자들을 처형하라 지시했다. 당시 서귀포시 모슬포경찰서 관할 양곡 창고에는 예비 검속으로 7월 초부터 붙잡혀온 347명의 양민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1950년 8월 20일 밤중에 이들 중 250명을 창고에서 끌어냈다. 서귀포시 대정읍의 섯알오름엔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일본군 탄약고 자리에 생긴 큰 웅덩이가 있다. 해병대와 경찰은 합동으로 섯알오름 웅덩이에서 새벽 2시와 5시경에 61명, 149명으로 나누어 이들을 총살했다. 가족들은 총살당한 시신을 수습할 자유마저 빼앗긴 채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6년 8개월이 지난 1957년에 거의 형체도 알 수 없는 시신 149구의 유골을 수습하고 그중 132구를 현재의 공동 묘역에 안장했다. 유족들은 묘비를 세워 이곳을 ‘백조일손지묘’라 칭하고 뒷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시신을 구별할 수 없었기에 머리뼈 하나, 등뼈, 다리뼈 등 큰 뼈를 중심으로 한 구씩 주검을 구성해 이장했다. 백 명도 넘는 사람이 한날 한곳에서 죽임을 당해 같은 곳에 묻혔다. 백조일손은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무덤 너머로 보이는 나무와 산방산마저 큰 무덤으로 보이는 밤이었다.

3. 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77주기 추념식을 하루 앞두고 찾은 평화공원에서 현대준(82세) 씨를 만났다. 그의 어머니 김경춘 씨는 6살·5살·2살 아이를 두고 1948년 12월 어느 날 행방불명됐다. 77년이 지나 이제는 얼굴과 손에 주름이 가득한 그는 어머니의 묘비를 바라보며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는지 몰라요. 아마도 정방폭포에서 총살당하셨거나 바다로 던져지셨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4. 곤흘동(곤을동) 잃어버린 마을

4.3의 전 기간을 통틀어 ‘광풍’이라고 불릴 정도의 민간인 대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은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로 간주한다”라는 포고문이 발표되면서부터다. 이 포고령은 곧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촌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작전(三盡作戰)’이 전개된다. 소위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 기간 중산간 마을의 가옥은 95%가 전소되었는데, 약 3만 채가 불에 태워졌다. 곤흘동 마을의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시기도 이 기간이었다. 1949년 1월 5일과 6일 양 일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1949년 1월 5일(음 1948. 12. 6) 오후 3∼4시쯤 군인 1개 소대 약 40명의 군인이 곤흘동을 포위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군인들은 곤흘동 집들을 수색하고 돌아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껌벅이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하고 젊은 사람들 10여 명 골라내어 곤흘동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죽였다. 마을 주민들은 화북국민학교에 가두었다. 이어 곤흘동도 불태웠다. 1월 5일에 불탄 곤흘동의 집들은 안곤흘 22채, 샛곤흘 17채였다. 학살은 1월 6일에도 이어졌다. 화북국민학교에 가뒀던 주민 중에 젊은이들 12명을 모아 화북동 동쪽 바닷가에서 학살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학살에 그치지 않고 곤흘동의 남아 있는 집들도 1월 6일에 불태웠다. 이날 밧곤흘의 28세대의 가옥도 모두 불태워져 곤흘동의 자취는 사라져버렸다. 67호의 적지 않던 마을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곤흘동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주변 마을로 옮겨졌다.

5. 너븐숭이 애기무덤

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은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주민들을 50~100여명 단위로 끌고 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 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집단 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븐숭이 소공원이다. 이곳은 4․3 이전 부터도 어린 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 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20여 기의 애기무덤이 모여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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