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의 본고장! 그 뿌리를 찾아서

2024-09-02

우리 도는 명실공히 서예의 본고장이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내년이면 15회째를 맞이한다. 잘 어울리진 않지만 필자가 중학교 때 나름 서예부에서 특별활동을 하였다. 사물함도 없던 그 시절에 동아리 수업이 있는 수요일에는 먹과 벼루, 화선지, 붓, 서진을 챙겨서 무거운 가방을 낑낑대고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서예의 본고장인 전북의 피가 모름지기 흐르고 있었나 보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문자를 사용했을까?

한자문화권에 속한 고대 한반도에서는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자가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대에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중국의 천자를 직접 만나려고 하였으나, 우거왕이 중간에 교역을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가 기원전 109년으로, 적어도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문자의 기록은 어떻게 했을까?

국가지정문화유산인 창원 다호리유적 1호 무덤에서는 붓과 삭도가 발굴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다호리 1호는 발견 당시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논흙이 공기를 차단하여 무덤 안에서는 통나무로 만든 목관과 대나무 바구니가 부장된 상태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나무로 짠 바구니 안에서 5점의 붓과 철로 제작한 삭도(削刀)가 출토되었으며, 이로써 다호리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한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 장화(張華)가 기록한 <박물지>에는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몽염(蒙恬)이 붓글씨용 붓을 처음 만든 것으로 전한다. 이후 기원후 105년에 채륜(蔡倫)이 종이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종이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대나무나 나무판자, 혹은 비단 같은 곳에 붓으로 문자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호리유적에서 붓과 함께 출토된 삭도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 나무판 같은 곳에 글씨를 잘못 썼을 때 칼로 긁어내는 지우개(書刀)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우개로 사용된 삭도가 바로 전북혁신도시 완주 신풍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다호리유적이 삼한(三韓) 가운데 변한(弁韓) 초기의 대표유적이라면, 신풍유적은 마한(馬韓) 초기의 대표유적이다. 신풍유적은 다호리보다 시기가 앞서는 기원전 2세기경의 유적으로 신풍유적이 발굴된 전북혁신도시 일대는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철기가 출현한 곳이다. 그 최초의 철제품 가운데 삭도가 들어있는 것이다. 단, 다호리유적은 오랫동안 습지로 보존되어 붓이 남아 있었지만, 신풍유적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유기물질은 이미 다 썩어서 사라져버리고, 철로 만든 삭도만 남아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아직 신풍유적에서 출토된 삭도가 문자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단정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자의 시작을 알려주는 최초의 유적이 전북혁신도시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국립전주박물관 역사실에는 이 삭도가 전시되어 있다. 길이가 20㎝ 남짓 되고, 겉에는 녹이 슬어서 실물을 보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이 앞으로 써내려갈 역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서예(書藝)의 본고장임을 자부하는 전북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한수영 고고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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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영 #문화마주보기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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