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가서가 열어준 신비의 문 [역사와 신학에서 본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기고]

2025-11-06

◆완전한 사랑을 찾아서

“당신은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기 240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185~254)가 성경의 아가서를 펼쳤다. “그가 그 입맞춤으로 내게 입을 맞추게 하소서.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좋으니라”(아 1:2). 뜨거운 사랑의 노래로 가득한 이 책을,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의 사랑으로 읽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더 깊이 들어갔다. 교회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신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와 나, 단 둘의 사랑 이야기. 이 발견은 이후 천 년이 넘도록 서양 기독교의 가장 순수한 영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흐름은 20세기 한반도로 흘러들어와 독생녀 탄생을 준비하는 영적 토양이 되었다.

오리게네스, 사랑으로 하늘에 오르다

오리게네스의 생각은 단순했다.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면 영혼이 하늘로 상승한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서 에로스, 곧 ‘완전한 아름다움을 향한 사랑’을 빌려왔지만, 그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사랑’으로 변화시켰다. 타락으로 하늘에서 멀어진 영혼이 사랑의 힘으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 여정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먼저 ‘정화’의 단계다. 죄를 씻어내고 마음을 깨끗이 한다. 다음은 ‘조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을 환히 비춘다. 마지막이 ‘합일’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다. 그는 아가서의 ‘입맞춤’, ‘포옹’, ‘신랑의 방’을 모두 이 사랑의 여정으로 읽었다. 입맞춤은 그리스도가 영혼을 깨우는 순간이고, 신랑의 방은 깊은 기도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내면의 공간이다.

아가서에서 비롯한 이 에로틱한 영적 결혼의 개념은 이후 모든 신부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하늘은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는 순수한 영혼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4세기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40~397)가 살던 시대는 전환기였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으면서 순교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 어떻게 완전한 헌신을 보일 수 있을까?

암브로시우스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결혼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동정의 삶이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순교’라고 불렀다. 목숨을 바치는 대신 평생을 바치는 헌신이었다. 순결은 하늘나라의 생활 방식이다. 그는 특히 동정녀들에게 설교하며 아가서를 인용했다. “신랑은 신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때로 멀리 계신 듯하지만 결국 벽 뒤에서 창으로 지켜보신다”(아 2:9). 동정녀의 삶은 그리스도를 끝없이 기다리고 찾는 신부의 삶이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를 모든 신부의 모범으로 세웠다. “마리아의 삶을 보라. 거기서 순결이 거울처럼 빛난다.” 이렇게 서방교회에는 순결한 신부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하늘은 완전한 순결로 준비된 그릇을 찾고 계셨다.

베르나르, 사랑을 체험하다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원장 베르나르는 아가서에 대한 86편의 설교를 통해 신부 영성을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라.”

베르나르는 합일을 입맞춤의 세 단계로 설명했다. 발에 입맞추는 회개, 손에 입맞추는 깨달음, 입술에 입맞추는 완전한 결합. 그리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체험의 책에서 읽는다.” 아가서는 경험해야 비로소 이해되는 책이었다.

놀라운 점은 베르나르 자신이 남성이면서도 신비체험 중에 자신을 사랑에 빠진 신부로 느꼈다는 것이다.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만이 중요했다.

베르나르의 가르침은 13세기 여성 신비가들에게 불을 지폈다. 메히틸트, 게르트루트, 하데비히 같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르나르가 체험에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학식이 없어도, 수도원 밖에 있어도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사람은 그의 신부였다.

두 강물이 한반도로

오리게네스가 상승의 문을 열었고, 암브로시우스가 순결의 토대를 놓았으며, 베르나르가 체험의 불을 지폈다. 천 년에 걸친 이 흐름은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순수한 신부 영성을 준비했다.

20세기, 이 신부 영성이 한반도에서 활짝 꽃피었다. 이용도 목사는 서구 신부신비주의를 한국의 심정으로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였다. 그는 1930년 1월 19일의 일기에서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세상 사람의 손에는 향기로움이 있고 주님의 손에는 채찍이 있어도 그래도 나는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겠어요”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예수를 관념이 아닌 심정으로 만났다. 십자가에서 신랑을 잃은 신부의 애절함, 육신으로 오신 예수의 고난에 대한 깊은 공감, 재림하실 신랑을 기다리는 간절함. 베르나르가 입맞춤으로 표현한 합일을, 이용도는 한국인 특유의 뜨거운 심정과 한(恨)의 정서로 체험했다. 1932년 동안주 장로교회 부흥회에서 이용도의 아가서 설교를 들은 홍순애는 깊은 회심을 경험했다.

평양에서는 허호빈이 입신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한을 깨달았다. 십자가에서 온전한 뜻을 이루지 못하신 예수님의 한, 신부를 맞지 못하신 예수님의 한이었다. 허호빈은 7천 배의 경배를 드리며 예수님을 위한 옷을 준비하고 혼인잔치 상을 차렸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신부 영성의 절정이었다. 서구의 정적(情的)이며 체험적 신비주의가 한민족의 실천적 영성과 한(恨)의 정서와 만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꽃피었다. 그 중심에서 1943년, 독생녀가 탄생한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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