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진 감독과 마리오 드라기의 고민

2025-02-09

증시 부진·성장 침체 처한 한국

‘경기력’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규모의 한계 극복 위한 ‘경쟁력’

“당장 실행하라”는 고언 새겨야

여자프로배구 정관장의 고희진 감독은 3라운드를 8전승으로 마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기록보다 경기력이 중요하다. 경기력이 좋으면 기록은 따라오기 때문이다.” 긴 시즌을 보내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는 한 경기의 승패보다 그 저변에서 선수들의 움직임과 경기 승패를 좌우하는 ‘경기력’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56조원, 30조원 규모의 연이은 세수 부족, 한국 주식시장의 부진,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성장률이 단순히 경기의 부침, 삼성 등 대표 기업의 영업실적, 금리 수준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 경제라는 팀이 한 경기에서 패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조금씩 경기력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이 필요하다.

2004년경 미국 워싱턴에서 근무할 당시,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이 한 연구소에서 강연한 후 객석에서 질문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질문은 이러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앞으로 잘될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한 나라의 자원(리소스)이 생산성이 높은 곳으로 신속하게 흘러가면 경제가 발전할 것이고 반대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인력, 자금, 기술이 더 높은 보상, 수익, 생산성을 찾아 원활하게 이동하고 있는가, 막혀 있는 곳은 없는가, 무엇이 막고 있는가?

작년 9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 경쟁력의 미래’라는 제목의 긴 보고서를 유럽연합(EU)의 신정부 출범 시기에 맞춰 발표했다. 유럽이 미국·중국에 비해 경쟁력에서 뒤지고 있는데, 이 상태가 지속되면 독자적 선택을 할 수 없게 되고, 자유·평화·복지·환경·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지킬 수 없게 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비굴한 노예로 떨어질 것인가, 존엄을 지키면서 살 것인가의 갈림길에 경쟁력 여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은 생산성이 지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에너지는 러시아에, 수출시장과 핵심 광물은 중국에,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드라기는 진단한다. 작은 나라들이 자금 조달, 투자, 정책 결정, 규제를 각자의 칸막이 아래서 수행하고 있어 규모, 속도, 기술, 전략적 조정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EU 회원국들이 국경을 넘어 상품 및 금융 시장을 통합하고, 산업정책을 통해 미국·중국 기업과 경쟁할 수 있게 기업 활동을 지원하고, 미래 기술, 국방 분야에 대한 공동의 투자, 조달, 우선순위 결정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미국은 동맹국에도 자국의 이익을 양보할 의사가 없고 특히 전략산업 분야의 투자를 자국 내로 끌어들이는 보호주의적 산업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유럽과 한국 모두에 수출시장으로서의 의미는 약화되고 전통 산업뿐 아니라 첨단 분야까지 강력한 경쟁자로 대두되고 있다. EU라는 국가연합 차원이냐 한국이라는 국경 내부의 문제이냐가 다를 뿐 전략적 목표하에 규모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구조개혁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과제의 본질은 같다. 다론 아제모을루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소득 및 자산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고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인센티브 구조의 포용성, 시민의 공론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다.

드라기 보고서의 영향인지, 파이낸셜타임스는 2024 올해의 단어로 ‘경쟁력’을 선정했다. 연임에 성공한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공약도 ‘경쟁력 제고’로 요약된다. 무역전쟁과 산업정책의 시대,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시대, 탈탄소 에너지 전환의 시대에 경쟁력이라는 세 글자를 빼고는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드라기는 유럽 내부에 고언을 했다. “당장 실행해라. 그러지 않으면 천천히 오래 고통받을 것이다.”

드라기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이 처한 구조적 도전도 다를 게 없다. 문제는 항상 실행 여부에 있다. 몰라서가 아니고 행동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탓, 국회 탓, 상대 진영 탓을 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금 뭐라도 시도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생존의 기로에 서게 될 만큼 한국의 상황이 심각함을 인정하는 것,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사회적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출발점이지 않을까? 정부가 답을 정해 알려줄 수 없다. 쉬운 해결 방안은 이미 소진됐다.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시대이다. 정부가 능력과 신뢰를 높이면서 소통, 조정, 전략적 결정에 나서고 출산, 육아, 주거, 의료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이 기업 경쟁력의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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