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생태계는 이대로 무너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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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반도체 생태계가 위기다. 메모리반도체를 석권하며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한국 반도체산업은 한마디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반도체 굴기 정책으로 범용반도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미국은 바이든 정부 때 막대한 보조금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첨단반도체 공장을 유치한 상태다. 재집권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은 여기에 한술 더 떠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관세 부과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중, 보조금으로 메모리 시장 잠식
대만, TSMC 중심 생태계 막강
한국 메모리에 편중, 균형 취약
반도체장비·팹리스는 약소국
대규모 팹리스 클러스터 구축
첨단업종 주52시간 규제 풀어야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반도체업계를 지원하기 위한 반도체 특별법은 국회에 묶여있다. 반도체업계 연구·개발(R&D) 분야에 한해 주 52시간제 규제를 예외로 하는 조항이 야당과 노동계의 반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중국 저가 공세와 대만의 TSMC 제국
중앙SUNDAY·포브스·월간중앙을 발행하는 중앙일보 S는 경기도와 함께 지난해 12월 10일 판교에서 ‘위기의 반도체 생태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라는 포럼을 열었다. 12·3 계엄사태로 정국이 혼돈에 빠졌음에도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정회 한국 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김경수 한국 팹리스선업협회 회장,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회장 등 업계 대표들과의 열띤 대담이 벌어졌다.
이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으며 정부·정치권·기업이 똘똘 뭉쳐 전시체제에 준하는 선제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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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D램 점유율이 지난해 5%까지 올랐다. 수년 전엔 존재감도 없는 기업이었다. 업계에선 CXMT의 반도체 DDR4의 가격은 재활용제품보다 싸다고 한다. 출혈 판매를 해도 정부가 보조금과 세제 혜택으로 적정이익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국 정부의 지원 덕분에 6년간 이어진 미국의 강력한 제재에도 중국 반도체 자급률은 2019년 15%에서 현재 25%까지 높아졌다.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대만 TSMC가 압도적 지배를 하는 가운데 중국 SMIC와 화홍반도체가 2위 삼성전자를 바짝 뒤쫓고 있다.
파운드리 반도체의 최강자 대만은 TSMC를 필두로 강력한 반도체 제국을 구축했다. 가장 발전한 선단 공정은 TSMC가, 차선 공정은 UMC, 성숙 공정은 PSMC 등이 분담하는 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태계를 만들었다.
대만은 팹리스(반도체설계)에도 일찍부터 공을 들여 팹리스기업 매출액 10위안에 미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미디어텍, 노바텍, 리얼테크 등 3개 업체를 올려놓고 있다.
챗 GPT 돌풍 이후 세계 반도체 시장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한국이 우위를 가진 메모리반도체는 정체되는 반면 AI 반도체 시장은 폭증하고 있다. 과거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끌어왔다면 AI 시대에선 소프트웨어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창의적인 AI 서비스기업과 이를 구현할 팹리스기업이 번창해야 건강한 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 여기에 메모리·파운드리 제조업체와 이를 뒷받침할 소재·부품·장비 산업, 패키징·디자인업체가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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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생태계의 균형 면에서 한국은 매우 취약하다. 한국은 메모리시장에서 D램의 75%, 낸드플래시의 50%를 점유하고 있고 파운드리에서도 삼성전자가 15%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제조의 강자다. 하지만 미국·일본·네덜란드가 90%를 과점하고 있는 첨단반도체 장비 시장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팹리스 분야에선 점유율이 2%도 안 되는 약소국이다.
AI 업체 숫자도 세계 10위권에 못 들어간다. 미국(2905개), 중국(709개)은 물론 인도(233개)보다 적다. 한마디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빼면 반도체 약소국이다.
김경수 팹리스산업협회 회장은 “한국 팹리스기업이 더 체력을 키워야 AI 반도체 패권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팹리스기업들이 몰려있는 판교테크노밸리에 대규모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데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팹리스 위한 공공 파운드리 공장 필요
수많은 팹리스 스타트업 중 대부분은 제대로 반도체를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5나노 이하 최첨단 공정으로 설계한 반도체 제품을 만들려면 최소 수백억원의 초기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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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삼국지』의 저자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20조원을 지원해 국내 팹리스부터 소·부·장, 패키징 업체까지 연구와 서비스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공공 R&D 팹인 KSMC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0조원을 투자하면 20년 뒤 300조원의 경제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만 TSMC가 정부 투자로 창업한 것처럼 한국도 비슷한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단 공기업 형태로 출발하고,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민간업체로 전환하는 모델이다.
TSMC는 1987년 대만 정부가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부사장을 지낸 모리스 창을 영입해 공기업으로 출발했다. 공기업은 대개 낙하산식 인사 등 비효율로 망하기 쉽지만 대만 정부는 모리스 창에게 전권을 맡겼다. 그는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TSMC가 위기에 빠졌을 때 78세의 나이로 복귀해 과감한 투자로 시장을 장악했다. 모리스 창이 퇴임한 이후에도 TSMC는 엔비디아·애플 등 세계 최고의 기업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섰다. 자본금 2억2000만 달러, 50명 규모로 시작한 TSMC의 현재 시가총액은 1조826억 달러로 삼성전자의 5배에 이른다.
AI 반도체 패권 선점, 영혼 갈아 넣어야
네덜란드 ASML의 EUV 노광장비는 업계에서 외계인을 고문해 만든 창조물로 통한다. 그만큼 현재 기술 수준으로 만들기 어려운 독보적인 제품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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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의 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뿐 아니라 독일의 광학기업 자이스 등 EU 내 광학·레이저·기계·화학업체의 공동작품이다. ASML의 성공 요인은 자체 기술력도 있지만 각 분야에서 최고인 협력업체들을 하나의 팀으로 조율해 집중적으로 연구개발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반도체산업은 신제품 개발에 최소 3~4년이 소요된다. 삼성전자 같은 거대기업과 함께 소재·부품·반도체설계·패키지·디자인 업체 등 전 공정이 하나로 뭉쳐야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 AI 혁명은 반도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자동차·에너지·로봇·유통·콘텐트 등 거의 전 산업 분야의 생존을 좌우하게 된다.
정치권은 반도체 연구개발에만 주 52시간제 적용을 하지 않는 작은 이슈를 놓고 갑론을박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모든 첨단업종으로 확대하는 공세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10일 국회교섭단체 연설에서 ‘ABCDF’라는 미래성장전략을 발표했다. A(인공지능), B(바이오), C(콘텐트), D(방위산업), E(에너지), F(제조업)를 집중적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재집권플랜이라는 이 전략에서 한국에 가장 절박한 반도체(Chip)는 빠져있다.
한국 반도체산업은 기술 격차, 자본 부족, 출혈 경쟁 등 숱한 고난과 역경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1990년대 전 세계 D램 업체는 26개였다. NEC·히타치·도시바·미쓰비시·후지쓰 등 일본 굴지의 기업이 참여하고 있었다. 치열한 ‘치킨게임’에서 만성 적자로 한국경제의 애물 덩어리였던 하이닉스는 살아남았다. SK가 인수한 이후 과감한 공격투자로 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독점하며 한국업체로는 유일하게 AI 혁명의 수혜를 보고 있다. 하이닉스가 부활한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담보로 맡기겠다”며 혁신에 동참한 직원들이다.
당시 하이닉스는 설비투자할 돈이 없어 200㎜ 웨이퍼 공장을 300㎜ 공장으로 리모델링해 썼다. 고가 장비를 개조해 다시 쓰는 ‘블루칩’ 프로젝트로 9500억원의 투자 효과를 거뒀다. 하이닉스의 혁신은 세계반도체 역사의 전설이 됐다.
당시 직원들은 매일 전쟁을 치르는 자세로 일에 매달렸다. 한 임원이 경영혁신 사례를 묶은 책의 제목이 『21세기 난중일기』였다.
지금 한국 반도체산업은 새로운 버전의 『21세기 난중일기』를 써야 할 때다. 기업은 물론 정부·지자체·정치권·국민이 합심해 연구 개발, 인재 양성, 전력·용수 등 인프라 확충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패권 전쟁에서 지면 한국 반도체산업의 운명은 종속의 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