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 눈이 내렸다. 봄에 내리는 눈은 흔치 않다. 글리코와의 첫 만남도 그런 느낌이었다. 글리코 삼형제는 눈발을 맞으며, 긴장하거나 경계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하입비스트> 앞에 섰다.
첫 한국 공연에서도 이들의 방식은 일관됐다. 카이는 손바닥에 적어온 한국어 문장을 직접 읽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친절해야 해요. 자신을 소중히 여기세요. 인생은 선물이에요.” 미리 계산된 연출 대신, 그 순간 흐르는 감정과 리듬에 따라 덤덤하게 관객과 주고받았다.
글리코가 추구하는 방향은 팀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글리코는 어린 시절 자주 들르던 일본 슈퍼마켓 ‘후지야(Fujiya)’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포키, 캐러멜, 카레 팩 같은 소소한 기억들이 지금의 감각을 만들었다. 빠르게 소비되는 흐름보다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 글리코는 변하지 않는 결을 지향한다.
봄에 눈이라니, 오늘 같은 날이 오히려 더 특별한 만남이 된 것 같아요. 많이 추우셨죠?
한국에서 4월에 눈이 내리는 건 드문 일이라고 들었는데, 저희에겐 완전 행운처럼 느껴졌어요. 공연도 마친 날이었고, 뭔가 분위기 자체가 감성적이였달까요. 추위도 그 감정 안에 들어가 있어서 오히려 좋았어요.

한국엔 자주 오는 편인가요?
자주 오려고 하고 있어요. ‘자주’의 기준이 애매하지만요(웃음). 한국은 가까우면서도, 그 안의 문화나 감성은 굉장히 다채롭고 깊잖아요. 그 미묘한 결들이 참 좋아요.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새롭고, 그 디테일이 음악이나 영상, 스타일 감각과도 닿아 있어서 자극이 돼요. 아직 우리가 다 경험하지 못한 공간, 장면,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올 때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느껴요.
이번 한국 공연은 어땠어요? 카이는 손바닥에 적어온 한국어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어요.
정말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특별한 시간이었어요. 한국 팬분들은 늘 저희를 놀라게 해요. 정말 열정적이고 따뜻하신 분들이라서, 무대에 서는 그 순간부터 뭔가 다른 기운이 느껴져요. 그래서 더 마음을 담고 싶었어요. 발음이 완벽하진 않아도, 직접 그 말을 전하고 싶었고요. 그래서 손에 이렇게 적어 왔어요. “한국에 오면 항상 마음이 뜨거워져요. 절 떠나게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 더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친절해야 해요. 자신을 소중히 여기세요. 인생은 선물이에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많은 분들이 그걸 기억해 주셔서 저희도 감동받았어요.



공연장에 자이언티와 트와이스 채영도 있던데요.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요?
네,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가족 같기도 하고요. 음악이나 스타일, 감성적으로도 저희와 맞는 부분이 많아서 함께 있을 때 편하고 즐거워요. 한국에서 우리가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죠.
공연 이후 헨즈에서 스탠다드 프렌즈와 함께 음악을 틀었죠.
사실 단순해요. 그냥 팬이었어요. 그들의 음악을 듣고, 감각을 보면서 ‘우리가 연결되면 뭔가 멋질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접근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모든 게 흘러갔어요. 지금은 형제 같은 존재예요. 음악을 넘어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죠.
글리코라는 이름엔 일본 과자에서 영감 받은 독특한 스토리가 담겨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저희는 캐나다에서 자랐는데, 예전에 카라테 수업을 들으러 다니던 도장의 길 건너에 ‘후지야(Fujiya)’라는 일본 슈퍼마켓이 있었어요. 수업이 끝나면 꼭 들러서 포키나 카레, 장난감 들어 있는 캐러멜 같은 글리코(Glico) 제품들을 샀죠.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하고 따뜻해서, 어느 순간 저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가 없겠다고 느꼈어요. 일본이라는 정체성, 캐나다에서의 유년기, 그리고 형제로서의 추억… 그 모든 걸 담은 단어가 글리코예요.
형제끼리 함께 밴드를 하는 게 늘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일단 말을 해요. 싸우기도 하지만 그만큼 빨리 푸는 것 같아요. 우리가 피를 나눈 사이라는 걸 넘어서, 평생 함께 해온 사람들이니까 서로를 잘 알고 있거든요. 감정선이 꼬이기 전에 털어놓는 게 중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아요. 익숙함이 주는 신뢰감이 있어요.
함께 밴드를 시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겠네요?
사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어요. 니코가 일본에 놀러 왔을 때였는데, 셋 다 한 공간에 있으면서 음악을 하니까 뭔가 확 와 닿았어요. “이건 그냥 해야 하는 일이구나.” 하고요. 운명적인 흐름이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 모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게 여러분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는 일본, 필리핀, 스페인이라는 각기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고, 캐나다라는 다문화 도시에서 자랐어요. 이게 우리에겐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오히려 자극이 많았어요. 다양한 문화에 노출되다 보니, 음식, 언어, 예절, 감정 표현 등 다양한 감각들이 섞여서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 같아요. 음악을 만들 때도 특정 장르나 감성에 갇히지 않고 여러 문화권의 소리와 이미지에 마음이 끌리는 것도 이 때문일 거예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진 건 분명한 축복이에요.
밴드 안에서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나요, 아니면 프로젝트마다 유동적으로 움직이나요?
기술적으로는 역할이 있어요. 니코는 레코딩과 믹스를 주로 담당하고, 키오는 DJ이자 베이스를 맡고, 카이는 비주얼 디렉션이나 촬영을 도맡아요. 하지만 창작은 항상 유동적이에요. 무언가 만들 때는 ‘누가 무엇을 하겠다’보단,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방식이에요. 우리가 공간에 같이 있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느껴져요. 그게 진짜 큰 무기예요. 일종의 텔레파시랄까.
서로의 가장 큰 강점과 약점이 있다면요?
음… 우린 셋 다 강하고, 셋 다 약해요. 서로의 강점을 채워주고, 약점을 커버해주는 게 우리가 함께하는 이유 같아요. 누군가가 떨어지면 나머지가 받쳐주고, 반대로도 마찬가지예요.

루크 케이시, 파스칼 테세이라 같은 디렉터들과의 작업도 화제가 됐어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비주얼 프로젝트나 감독이 있나요?
웨스 앤더슨같은 미장센이 강한 감독과 작업해보고 싶어요. 색감이나 구도가 음악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상상만 해도 재밌고요. 라우자나 좀 더 어두운 ‘누아르’ 무드의 콘셉트도 시도해보고 싶어요. 우리가 음악에서 텍스처를 중요하게 생각하듯, 영상에서도 그런 결을 살리고 싶거든요.
더 스트록스, 예(칸예 웨스트)같은 아티스트가 글리코의 음악에 영향을 줬다고 했죠.
어릴 때부터 새로운 음악을 찾으면 서로 먼저 들려주고 자랑했어요. ‘야 이거 들어봤어?’ 하면서요. 그런 공유가 쌓이고 쌓여서 지금은 취향이 거의 통일된 것 같아요. 물론 다 장난끼도 많아서 때로는 ‘트롤 음악‘도 같이 좋아하죠(웃음). 우리가 자라면서 들어온 모든 레퍼런스들이 이젠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된 셈이에요.
저희와 함께한 코인노래방 촬영에서 너바나,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밴드들도 영향을 준 아티스트인가요?
물론이죠. 시대를 초월한 음악들에는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잖아요. 사운드도 사운드지만, 그들이 남긴 태도나 퍼포먼스도 큰 영향을 줬어요. 우리도 그런 전설의 일부처럼 계속해서 에너지를 이어가고 싶어요.

글리코는 ‘사운드보다는 텍스처의 밴드’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그 말 되게 섹시하게 들리네요.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도 결국 ‘느낌’이고 ‘결’이라서, 그렇게 봐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첫 EP가 나오기 전부터 피닉스의 일본 투어 오프닝 무대에 섰던 경험도 있죠. 어땠어요?
정말 꿈 같았어요. 우리가 늘 듣던 밴드와 같은 무대에 선다는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피닉스는 지금도 우리를 응원해주는 존재라 감사한 마음이 크고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엔 긴장도 많이 했지만, 막상 공연을 시작하니까 몸이 알아서 움직였던 기억이 나요.
세 분 모두 비주얼적인 존재감이 강하고, 실제로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도 많이 했죠. 원래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나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늘 우리 옷에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어쩌면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걸지도 몰라요. 물론 지금은 저희가 더 주도적으로 스타일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거기서 온 것 같아요.

한국 문화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 한국 아티스트와의 협업 계획도 있을까요?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요. 생각보다 더 빨리 공개될 수도 있고요. 음악이든, 패션이든, 영상이든… 한국과의 접점은 앞으로도 점점 더 늘어날 거예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혹시 새로운 앨범을 기다려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올여름에 만나요. 꽤 오래 준비해온 앨범이라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