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은 정당의 몰락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같은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몰락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한 희귀 인물이다. 한 유서 깊은 정당이 정치 무경험자를 대선 후보로 만든 것부터가 망조였다. 그 결과, 대선에서 진 민주당이 아니라 이긴 국민의힘이 비대위와 직무대행 체제를 반복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국힘은 늘 위기였다. 안정적 당 운영을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윤석열 문제만 보는데, 정당이 문제였다.
정당과 정당정치에 무지했던 윤
정당 책임정치 부재는 곧 무정부
윤을 낳고 윤과 함께 망한 국힘
정당의 미래를 이끌 사람이 필요
정당 없이 정부를 운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시바 내각처럼) 수상이나 총리 이름 뒤에는 ‘내각’을 붙이고, (트럼프 행정부처럼) 대통령의 이름 뒤에는 ‘행정부’를 붙이지만, (자유당 정부, 노동당 정부처럼) 정부 앞에 쓸 수 있는 말은 ‘정당’이다. 정당 없는 정부는 군주정뿐이다. 그러나 정치 초년생 윤석열은 정당과 정당정치에 무지했다. 무시하거나 아래로 보았다. 국힘은 정부 운영을 책임지는 집권당(government party)으로 존중받은 적이 없다. 여당이 이런 취급을 받았는데 야당이 ‘국정의 동반자’로 존중되기란 더 불가능했다.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우리식 정치 때문에, 개인으로 대통령이 되는 일이 가능하긴 하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했듯, 여론조사는 여론조작의 다른 말이다. 여론은 만들 수 있다.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 우리는 여론조사로 대선 후보를 뽑는다. 여론조사 결과만 좋으면 다 되는 나라다. 여기에 팬덤을 더하면 여론뿐 아니라 정당도 방송도 인터넷 세상도 다 가질 수 있다. 지금은 옳은 일을 하겠다는 신념이나 대의에 대한 헌신으로 정치하는 시대가 아니다. 여론 동원과 팬덤에 대한 아첨으로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다. 정치인이 연예인처럼 행동하면서 정당정치가 아니라 ‘청중 정치’가 민주주의로 둔갑한 시대다. 엄밀히 말하면 정치랄 게 없는 현실이다.
현실이 이러니 여론이 주목하는 개인이 되면 대통령까지 올라갈 수는 있다. 그러나 정부라는 거대한 복합체를 개인으로 운영할 수는 없다. 정당의 좋은 역할이 없이도 통치할 수 있다고 믿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왕이어야 한다. 군주정에서라면 왕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민주정에서는 불가능하다. 영국에서 보듯, 민주정에도 왕은 있다. 하지만 그때의 왕은 존엄할 뿐 힘이 없어야 한다.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못할 때” 왕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왕처럼 통치하려 했고, 뜻이 다른 이들을 불충(不忠)한 존재로 멀리하며, 왕실처럼 은밀한 관계로 일을 도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계엄 이전에 정부는 이미 작동 불능의 무정부 상태였다.
국힘은 지난 일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정당을 정당답게 복원하는 과제가 가장 시급한데,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난립한 후보들은 자신만이 이재명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잘못된 과녁이다. 대통령을 누구로 할지 말지는 우리 같은 시민이 결정한다. 사람들은 정당을 통해서 후보를 본다. 지금 국힘은 믿을 수 있는 정당이 아니다. 그간 뭘 했는지, 앞으로 뭘 할지를 말하지 못하는 정당이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고 본질인데, 다들 대통령이 될 것처럼 착각한다.
19세기 두 차례나 영국 총리를 지낸 보수당 지도자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말했듯 “정당이란 조직된 의견” 그 자체다. 잘 조직된 정견은 정당의 생명인데, 국힘은 그런 게 없다. 당원과 지지자가 안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나 체계도 없다. 오래된 당원은 떠났고 신규 당원은 들어오지 않는다. 대의원은 정당의 꽃이다. 전당대회란 ‘전국대의원대회’의 줄임말이자 최고 대의기구다. 그런데 국힘에서 대의원의 역할이 없어졌다. 정당 정신을 구현할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상근 당직자로 불리는 당 관료제는 조직의 근간이다. 그런데 그들이 무기력증에 빠졌다. 공유하는 목표도 열의도 없다. 남은 건 의원들인데, 대구-경북이 중심이 된 낡은 인적 구조만 두드러진다. 정당으로서 국힘은 기초부터 꼭대기까지 완전히 망가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선 후보로 나선 누구도 이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도 개인적 기회만 좇으며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정당 없이 자유 정부란 없다는 선언을 가장 먼저 한 이는 18세기를 대표하는 보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였다. 그는 정당만이 “권력 추구를 위한 고결한 투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민주주의란 “한 정당이 기초하고 있는 일반 원리에 동의하지 않을 때 (…) 다른 정당을 선택”할 수 있는 정치체제다. 국힘 후보들이 말하듯, 이재명의 민주당을 비토하는 시민이 많다고 치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그 다른 정당’이 국힘일 수 있을까. ‘갈등의 구조화와 대안의 정의’라고 하는 정당의 교과서적 기능조차 못 하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국힘에게는 당장의 대통령감보다 정당의 미래를 이끌 사람이 필요해 보인다.
박상훈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