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가 된 한민족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2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의 불길이 마침내 민족 전체를 깨운 것이다.
개신교가 중심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체포된 인원 중 기독교인 비율이 18%에 달했다. 특히 여성 피검자의 65%가 기독교인이었다. 평양 대부흥으로 고양된 영적 각성과 민족의식이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이다. 18세기 미국에서 제1차 대각성이 청교도 정신을 부활시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종교적 각성을 민족의식으로 발전시키고, 독립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3.1운동으로 7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4만7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그러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돌아보면 일제 치하의 한민족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았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밀려났다. 권력과 결탁한 유교, 왜색화된 불교, 일제에 순응한 가톨릭. 반면에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칼을 찬 훈도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제 막 전래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3·1운동 이후 개신교는 일제의 집중 감시 아래 놓였다. 일제는 겉으로는 ‘문화통치’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민족분열통치였다. 친일파를 양성해 민족을 분열시키고, 고등경찰을 동원해 독립운동가를 색출했다. 교회 설교까지 감시 대상이 되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조차 불온사상으로 의심받는 암울한 시대였다.
◆경건의 폭발, 신령집단의 출현
1929년, 세계대공황이 터졌다. 일본은 경제가 무너지자, 군부가 전면에 나섰다. 이들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제국주의 정책을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획책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기성교회는 형식에 빠져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민족분열통치의 영향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전혀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수많은 신령집단들이 출현한 것이다. “일본의 마수, 선교사의 거만, 기성교회의 형식화”에 저항하며 일어난 ‘경건의 폭발’이었다.
철산의 새주파, 원산의 여선지파, 이용도파가 대표적이다. 계시와 환상, 신유와 방언이 넘쳤다. 제도권 교회가 채워주지 못한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새주님으로 불리던 여성 지도자 김성도는 기도 중에 계시를 받았다.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래 예정이 아니다. 재림주님은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 오신다.” 원산의 백남주는 새 진리를 밝힌다며 『새 생명의 길』을 출간했다. 이용도 목사는 아가서에 심취해 예수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했다. “나는 주님의 신부요, 주는 나의 신랑이시다.” 한국적 신부신비주의의 탄생이었다.
기성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1933년, 축출당한 이들이 모여 예수교회를 창립했다. ‘오직 예수’를 기치로 연합한 것이다.
◆신사참배, 무너지는 교회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다. 조선은 병참기지로 전락했고, 황민화정책이 시작되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젊은 남자들은 징용과 징병으로,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갔다. 민족혼이 철저하게 말살당할 위기였다.
일제는 교회의 급소를 찔렀다.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사의 중심에는 천조대신, 태양의 여신이 있었다. 일제는 종교 행위가 아닌 국민의례라고 주장했지만, 신앙인들에게 이는 명백한 우상숭배였다.
미국, 캐나다, 호주 출신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제는 미션스쿨을 폐교시키고, 선교사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했다. 압박 속에서 선교사들은 사직하거나 본국으로 떠나야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적성국민으로 분류되어 강제 추방되거나 억류되었다.
한국 교회는 방향감을 상실했다. 신령집단과 기성교단이 하나 되어 신사참배를 물리쳤어야 했다. 미국 선교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니 미국 정계를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교계는 사분오열했다. 내부적으로는 신학적 주도권과 교권 다툼, 지역감정이 폭발하여 서로를 비난했고, 외부적으로는 신사참배라는 거대한 압박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예수가 오기 전, 헬라 왕조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을 때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분열되었다. 권력과 결탁한 자들, 율법에 매달려 형식화된 자들, 무장 투쟁에 나선 자들. 그리고 부패한 교권에 실망하고 광야로 물러나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한 자들이 있었다.
한국 교회의 분열도 이와 닮아 있었다.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일제에 적극 협조했고, 어떤 이들은 굴복했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투쟁을 벌였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즉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겠다고 외치며 네 차례 투옥 끝에 순교했다. 침례교회(동아기독교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유일한 교단이었다. 성결교회도 강력히 저항했다. 어린 양 혼인잔치에 나아갈 성결한 신부 교회가 되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심한 탄압 속에 굴복하고 말았다. 천황 중심의 영구적 세계 지배를 꿈꾸던 일제에게 이들의 재림사상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광야에서 준비된 빛
신령집단은 산과 들로 흩어져 기도하며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했다. 유대 광야의 에세네파가 그랬듯이, 그들은 희망 없는 세상과 단절하고 정성을 드리며 하늘의 때를 기다렸다. 기성교회는 그들을 이단시했다. 일제는 그들을 탄압했다.
1943년, 교회는 역사상 가장 깊은 밤을 지나고 있었다. 살아남은 기성교단들은 애국헌금을 바치고, 기미가요를 제창하며, 동방요배와 신궁 참배를 해야 했다. 태양신 숭배의 억압이 교회를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어서 속히 재림주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령집단의 기도와 눈물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평안남도 안주에서 한 여아가 태어났다. 그 깊은 어둠의 자리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 조용히 이 땅에 내려온 것이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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