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과 몰상식의 시대… ‘화이부동(和而不同)’

2025-01-15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올바른 가르침(윤리)을 설파하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마침 한 무리의 아이들이 떠들며 놀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오자 한 아이가 질문을 했다.

‘당신은 스스로 현명하다고 하는데 이 질문에 답해 보세요. 해는 아침에 가장 크게 보이고 낮에는 가장 뜨거운데, 해가 언제 땅과 가장 가깝지요?’

현명한 사람이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동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그것도 모르면서 어찌 남을 가르치려 하느냐며 놀렸다.

그 떠돌던 사람은 공자다. 지어낸 이 우화는 아마 현대 중국 신소설의 개척자 뤄모러(郭沫若; 1892〜1978)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은 이 정도 과학문제는 중학생만 되어도 쉽게 답할 수 있다.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은 공자 당시인 2,500여 년 전보다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 지구 어느 지방에서 어느 날 몇 시 몇 분 몇 초에 개기일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는 자연과학 지식은 이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가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며 그토록 호소한 인간다움이란 윤리의식의 수준이 과학지식의 축적에 걸맞게 발전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있겠는가? 윤리수준은 발전한 면도 있지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거나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지 않았을까?

지식은 언제나 직선적으로 발전하지만 윤리(지혜)는 좀처럼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젊을 때는 공자의 말씀을 고리타분한 고급 잔소리쯤으로 이해했다. 대학 때 논어를 처음 읽었다. 그 뒤 사회의식이 생기고 나서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란 공자 말씀을 접하고는 무릎을 딱 치면서 공자에 대한 이해가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했다. 이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렇다.

‘동이불화’의 소인배는 윤리적 원칙과 의(義)는 뒷전이고 오직 이익만을 위해 남과 어울리기는 잘 하지만 사회의 진정한 화합(和合)에는 별 관심이 없다. ‘화이부동’의 군자는 남과 어울릴 때 이익을 쫓지 않고 윤리적 원칙과 의(義)를 지키며 화목하되 다른 사람의 속물근성에 따라가지 않는다. 남과 어울리되 자신의 주체성이나 정체성은 잃지 않는다.

인간 누구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속물적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갈등을 공자의 시선보다 더 예리하게 심리적으로 관찰한 예는 달리 없으리라.

우리 사회는 무리짓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동문회, 향우회, 전우회같은 특정 인연을 기반으로 한 모임이 많다. 산악회, 기우회, 조기축구회같은 취미를 즐기는 동호회 모임도 많다. 자유총연맹같은 세금을 흡혈하는 관변단체도 숱하게 있다. 의사협회, 변호사협회, 상공회의소같은 이익집단도 있다.

인연이나 취미나 이익으로 무리짓는 집단은 거의 예외 없이 동이불화의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집단은 예외 없이 동이불화 집단이다. 이들을 나는 ‘동이 집단’이라 부르겠다.

나보다 우리와 사회를 앞세우며 자신을 희생하는 세력이 있다. 과거에는 독립운동, 통일운동 세력, 요즘은 진정한 민주화 세력이 그렇다. 이들을 나는 ‘화이 세력’이라 부르겠다.

지금 옛날로 돌아가 백성이 처음 생겨 아직 정치의 우두머리가 없을 때 ‘천하의 사람은 의로움(義)이 다르다’는 말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의 의로움이 있고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개의 의로움이 있으며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개의 의로움이 있다.

사람 수가 늘어나면 소위 의로움 역시 늘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은 옳고 다른 사람의 의로움은 그르다 하여 서로 비난했다. 안으로는 어버이와 자식, 형과 동생이 원수가 되고 모두 마음이 흩어져 서로 화합할 수 없었다.

힘이 남더라도 서로 돕지 않으며 좋은 방도가 있어도 감추어 서로 가르치지 않으며 남은 재산이 썩어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천하의 혼란은 짐승의 세계와 같았다.

이는 공자의 후배 묵자(墨子)가 당시 사회를 꼬집은 말이다. 지극한 사기꾼이 아니면 수많은 장삼이사(張三李四)나 현명한 사람(지성인)이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길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묵자가 말하는 의로움(義)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개인 이익이나 욕망’으로 나는 읽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다. 이 독립적인 존재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면 이익이 충돌해 싸움이 일어나고 세상에 혼란이 온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욕망과 이익조차도 실현할 수 없다.

이는 영국의 사상가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나오는 ‘자연상태’와 매우 비슷한 상황이다. 홉스의 자연상태란 짐승의 세계를 뜻했다.

‘동이 집단’은 사회적인 ‘화(和)’란 윤리에 눈치를 보지 않기에 본능적 욕망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찾아 나서는데 거침이 없다. ‘화이 세력’은 ‘화’란 윤리의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과 과정에 있어 윤리적 정당성을 지녀야 하기에 움직임에 몹시 신중해야 한다.

분단의 질곡에 처한 지금 우리시대는 2,500여 년 전 공자, 맹자의 전국시대만큼 어지럽다. 2024년 12월 3일 계엄 이후의 상황은 마치 홉스가 말한 짐승의 세계와 다름이 없다. 인간으로 지켜야 할 도리가 눈곱만큼도 없는 무도(無道)한 ‘동이 집단’의 ‘불공정’과 ‘몰상식’의 쓰나미가 우리를 덮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사태 이후 ‘비상시국’이란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자는, 다시 말해 대구 지역에서 사회 원로가 앞장서서 ‘화이’ 세력을 조성하자는 요구를 받고 있다. 나도 어느덧 나이 70, 원로로 불리고 있다. 마음은 1970년대 대학 다닐 때와 다름이 없는데 말이다.

원로의 기본적인 역할은 지갑은 열고 입을 닫는 역할이 아닐까? 이를 테면 1980년대 후반 이후 세대들이 계획했거나 계획하려는 일에 방어막이 되거나 기댈 둔덕이 되는 것이 원로들이 취할 최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쉽게도 산전수전 다 겪은 원로들도 ‘동이불화’의 때를 벗지 못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민주화를 지향한다면 어떤 모임이든지 ‘화이’가 궁극적 목표인데 구성원들에게 개인적 욕망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진정한 ‘화이’는 요원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룬 듯 하다가 해변에 쌓은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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