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학교수'에 속아 신안군 미술관 조성
피의자 천사상 318점 설치하고 20억 편취
청도군·천주교성지도 공략,전문가검증 절실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자신을 '세계적인 성상(聖像) 조각가'라고 사칭하며 전남 신안군과 경북 청도군에 수십, 수백 점의 조각을 설치하고 막대한 금액을 챙긴 70대 남성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문제의 이 남성은 자신을 파리 유명 미술대학(에콜드보자르) 출신에, 파리7대학 교수를 역임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사기 혐의로 수차례 복역한 전과 6범의 피의자였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기꾼 작가가 지자체 뿐 아니라 전국의 천주교 성당과 천주교 성지에도 성상(聖像) 조각과 부조(릴리프)를 잇따라 설치하며 다년간 전국을 누볐다는 점이다. 이에 천주교 교구측은 전수조사를 실시 중이고, 일부 성당에서는 작품 철거를 고려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사기꾼 조각가 한 명에게 허망하게 뚫려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간단한 '작가 이력검증'과 '작품평가 감정'만 거쳤어도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 곳곳에서 연달아 벌어지며 요즘 미술계는 벌집 쑤셔놓은 형국이다. 과거에도 학력과 이력을 과대포장한채 온갖 감언이설을 동원해 질 낮은 작품을 팔아치운 작가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어이 없고, 국민및 주민 혈세가 투입되는 지자체와 천주교성지·성당들이 한꺼번에 당한 사태는 전무하다.

신안군과 청도군에 따르면 최바오로(72,최영철)라는 작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에 일명 '천사상' 등 318점(조형물 3점 별도)을, 청도군에는 신라시대 화랑 조형물 20점을 설치했다. 전남 신안군은 서해 바다에 1004개의 섬이 늘어서 있어 '천사의 섬'으로 불린다. 이 1004개의 섬을 각기 특색있게 꾸미고, '1도 1 뮤지엄'을 만들어 세계인들이 찾도록 하겠다는 것이 신안군의 복안이다. 일본에 나오시마라는 예술섬이 전세계적으로 크게 각광받듯 신안을 '아시아의 또다른 나오시마'로 만들고자 박우량 신안군수를 비롯해 군 전체가 팔을 걷어부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우량 신안군수는 지난 2013년 '박물관의 고장'으로 꼽히는 영월군 방문시 영월군 소개로 찾은 '영월종교미술박물관'(최바오로 작가가 2009년에 직접 설립)에서 감전되듯 천사상 조각에 빨려들었다. 박 군수는 이 박물관에 즐비하게 전시된 하얗고 뽀얀 천사상들을 보고, 신안의 '1004 프로젝트'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DJ의 본향 하의도의 '평화의 섬' 컨셉에 꼭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스스로를 '세계 정상의 조각가'라고 포장한 최씨는 DJ 생가가 있는 하의도를 '평화와 사랑의 섬으로 만들 수 있다'며 흰 대리석으로 만든 천사상 설치를 제안했다. 파리 대학 교수,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 피렌체미술관 전속작가라는 최씨의 화려한 경력에 신안군측은 깜빡 넘어갔다. 그리곤 박 군수가 신안군수로 재선된 2018년부터 '지붕도, 담도 없는 야외 천사상 미술관 프로젝트'가 일사천리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19년 하의도 선착장에서부터 바닷길에 총 318점의 천사 조각상 설치가 완료됐고 '울타리 없는 천사상 미술관'으로 명명됐다. 작가에게는 약 19억원이 지급됐고, 여러 언론이 이 천사상 미술관을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내세운 경력을 단 한 건만이라도 검증했으면 프로젝트가 애시당초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군수의 의욕과 열정에 브레이크를 밟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전문가에게 의뢰해 작가 검증과 작품 검증을 한차례만이라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최씨가 내세운 파리7대학은 의과대학과 자연과학대가 있는 대학으로, 미술관련 학과는 없다. 최씨가 조각가이면서 파리7대학 명예 교수를 역임했다고 하는 것은 따라서 소가 웃을 일이다. 또 '피렌체미술관 소속작가'라는 이력도 어이가 없는 경력이다. 전세계 어느 미술관도 소속작가를 두고 있는 미술관은 없다.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을 전시·판매하는 화랑만이 전속작가제를 운용할 뿐이다.
미술전문가에게 최씨의 학력과 경력을 보여주기만 했더라도 금방 허위임이 밝혀졌을 텐데, 군내에 전문가가 있거나 전문가 자문시스템이 가동 중이었다면 초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일이었다. 신안군과 청도군은 전문가 검증은 뒤로 한채, 최씨에게 그저 속절없이 넘어갔다.

특히 신안군과 청도군은 최씨의 여러 이력 중 '파리 아트저널'이 선정한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예술가'라는 타이틀에 매료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로 프랑스에 그런 저널(매거진)은 없고, 국내 유령단체가 작가들에게 돈을 받고 임의로 그럴싸한 타이틀을 안겨준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는 "1980~90년대에는 몇십만 원만 내면 누구나 혹할 만한 작가이력을 만들어주거나, 미술상을 주는 곳이 있었다"며 이를 활용한 사람이 자신 뿐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2019년 하의도에 '천사상 미술관'을 완공하고 최씨에게 명예군민증까지 전달했던 신안군은 그의 학력과 이력이 허위로 드러나자 조각상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신안군측은 "주민들 사이에선 바닷가게 흰 대리석 전사조각이 늘어선 게 보기 좋으니 '그대로 두자'는 의견도 있어 향후 법적 판단과 여론 등을 신중히 고려해 처리하겠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높은 좌대에 올린 대형조각 등 318점에 달하는 조각을 모두 철거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대형 돌조각을 철거할 경우 엄청난 쓰레기가 나오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어서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 특히 공공조형물을 설치할 때는 면밀한 사전검증 등이 수반되어야 함을 이 사건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1953년 미국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최바오로씨는 초·중·고교를 다니는 대신 10대 초반부터 서울 중구 신당동의 철공소와 목공소를 전전하며 일했다. 이 때 익힌 손기술이 그를 조각의 길로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씨는 "일곱살 때 이탈리아 유명 작가의 양자로 입양돼 일찌기 예술에 눈을 뜰 수 있었다"며 눈물 겨운 개인사를 주위에 읊어댔다고 한다.
최 씨는 2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상습사기죄 등으로 수차례 복역했다. 최씨는 이력서에 1992년에 파리7대학 명예교수로 재직했다고 썼지만, 실제로 이 시기 그는 청송보호감호소(청송교도소)에서 사기 등 혐의로 복역 중이었다.
수감 중 1995년에 고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전과목 만점으로 수석 통과했고, 이게 최씨 학력의 전부다. 결국 정규 예술교육을 받거나, 해외서 조각가로 활동한 경력이 없음에도 파리및 베를린의 대학교수, 광주비엔날레및 부산비엔날레 출품작가라는 사기이력을 내세우며 조각가로 활동해왔다. 돌조각 등이 쌓아자 그는 강원도 영월에 개인미술관인 '영월종교미술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
신라의 역사유산인 화랑을 기념하는 화랑풍류마을공원에 최씨 조각 20점을 설치한 경북 청도군은 신안군과는 달리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됐다. 최근 대구지법 형사12부는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최씨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보호관찰, 사회봉사 120시간을 명령했다. 최씨는 2022년 청도군에 "내가 세계적인 조각가인데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접근해 조형물 20점을 설치하면서 2억9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최씨가 청도군에 설치한 조각은 고급 이탈리아 카라라산 대리석으로 국내서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 중국의 돌공방 등에서 만든 것으로 조사됐다.

신안군 또한 최씨의 허위이력 등이 불거지자 작년초 최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신안군 사기의혹 사건은 청도군 사건과 병합돼 심리가 함께 진행됐다. 그러나 대구지법은 청도군 사건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신안군 사건은 "경력을 속인 것은 맞지만, 계약 체결에 범죄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경북도는 작년 7월 청도군의 사기 조형물 설치와 관련해 감사를 진행한 뒤 청도군과 김하수 군수에게 경고처분을 내리고, 관련 공무원 8명에 대해 징계를 요구했다.
현재 신안군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지난해 천사상 설치경위를 밝힌 표지석을 철거했고, 설명문 중 최씨 이력은 삭제했지만 천사상 318점은 아직 그대로 두고 있다. 신안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학력 경력 등을 속인 최씨를 고소한 뒤, 재판에서 혐의가 확정되면 민사소송을 제기하려 했는데 무죄가 나와 매우 난감하다"며 "검찰 항소여부와 문화계, 주민 여론을 총체적으로 살핀 뒤 처리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신안군은 세계적인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58, 덴마크)의 대형 원구형 설치작품 '숨결의 지구'를 총 사업비 57억원을 들여 작년 11월 도초도에 완성했으며, 안토니 곰리(조각가)와 박은선(조각가)+마리오 보타(건축가) 프로젝트 등을 계속적으로 추진하며 예술섬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사태로 제동이 걸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신안군 의뢰로 최씨의 천사상을 감정한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의 정준모 대표(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는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이라 했지만 모두 중국과 필리핀의 제작공방에서 깎아낸 싸구려 조형물이었다. 대리석 자체도 질이 한참 떨어지고, 작품의 예술적 수준도 수준 미만"이라고 평가했다.
정준모 대표는 "최씨는 광주비엔날레 출품작가라고도 자신을 포장했는데 이같은 이력은 비엔날레 운영위에 확인하면 금방 확인이 된다. 신안군이 작가와 계약을 체결하기 전, 최소한의 검증시스템을 거치기만 했어도 이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기전과 6범의 피의자가 중국 돌공장 등에서 만들어온 어설픈 돌조각을 '세계적인 조각가의 작품'으로 포장해 공공에 설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스스로를 '세계 300여 성당과 성지에 성상을 제작한 작가'라고 소개하고, '거장 로댕의 뒤를 이을 조각가'라는 찬사도 들었다는 최씨는 '바오로 최'라는 작가명으로 서울 대치동성당, 목동 성당, 미리내 성지, 솔뫼 성지 등에 다수의 천주교 성상과 목조 벽화 등을 제작 설치한바 있다. 천주교계 역시 사기전과자에게 어이없게 당한 셈이다.
국내 조각가들의 단체인 한국조각가협회의 김정희 이사장은 "지자체라든가 기관에서 조각및 조형물을 설치할 때는 반드시 작가 검증과 작품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이를 생략할 경우 신안군, 청도군처럼 주민혈세와 국고가 낭비되고 여러 문제점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며 "이번 사태로 가뜩이나 경기침체 등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 국내 조각예술계가 더욱 위축될까봐 우려된다"고 밝혔다.
화려한 허위 경력을 내세우며 부실한 조각을 전국 각지에 설치하며 물의를 빚은 이번 사기행각은 결국 '전문가 검증과 논의'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안군은 물론이고 여러 지자체가 '한국의 나오시마'를 꿈꾸며 설익은 예술프로젝트를 치밀한 검증도 없이 밀어붙이는 것은 아닐지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 전문가 검증시스템을 구축하고 각계 전문가들의 진단과 분석을 반드시 거치고, 미래 지속가능한 우수한 작품을 설치하겠다는 목표와 비전의 실행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