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중국을 개항시켜 자국 상품을 아시아에 수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항구가 상하이였다.
이곳에서 중국 상인들은 영국산 제품을 동아시아 각지로 재수출하였다. 특히 일본은 이러한 주변국의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하면서 1877년에 나가사키와 부산 간에 정기 직항로를 개설, 상해에서 건너온 영국산 면제품을 조선에 독점 중계무역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중국 상인들이 앞서 누려오던 무역 기득권을 서서히 빼앗아 갔다.
그 당시 조선 내로 물자가 출입하는 통로는 크게 두 곳이었다. 하나는 남쪽 동래부이며, 다른 하나는 북쪽 의주부이다.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기존의 무역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1876.2. 27일 체결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다.
동년 8. 24일 상동 조규 부록(附錄) <통상 장정(무역규칙)>을 체결하였는데, 조·일은 수입세와 수출세를 징수하지 아니한다는 관세 폐지 각서를 교부했다.
1858년 체결된 미·일수호조약은 협정관세는 오직 일본 정부에게만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편무조약이었으나, 조·일수호조규는 ‘상호 무관세 원칙’이었다.
또한 일본과 중국, 네덜란드 간에는 관세부과의 대상이 국경을 넘는 중국, 혹은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반면에, 일본과 조선 간에는 관세부과의 대상이 일본의 상인이었다. 당시 협상에 임했던 조선 정부 관리들의 나름의 노력을 알 수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조일 무역규칙으로 부산이 개항되면서 일본 상인들은 무관세로 상품을 판매해 큰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의주부에는 「관세청(管稅廳)」(오늘날의 關稅廳이 아님)과 수검소(搜檢所)」라는 무역 관련 과세 관청이 있었고, 대중 무역 물품에 대하여 면포의 경우 약 3∼ 6.7% 수입세, 10%의 수출세를 부과한 거로 추정된다.
관세청은 무역세의 수납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고, 수검소는 실제로 수출입품의 내역을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부산항의 교역은 모두 무세(無稅)로 되었기 때문에 부산항은 점점 번창하지만 의주 쪽은 점점 쇠잔하고 미약하게 되었다.
그래서 의주의 관리들이 곤란한 사정을 말하며 “부산항에서도 원래대로 세금을 거두도록 하자”고 주장하였고, 항세(港稅)뿐만이 아니라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를 면제받게 된 일본 상인들과의 차별로 만상들의 불만은 극심하였다.
만상들과 의주부 관리들은 의주와 부산의 세수 형평성의 문제를 거론하며 조선 정부를 압박하였고, 조선 정부로서도 재정 확보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개항을 전후해서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이 조선에 들여온 상품은 영국산 기계 섬유 면제품인 옥양목(玉洋木)이었다.
1878년 당시 우리나라에 수입된 영국제 면제품은 전 수입품의 76%에 달하였고, 수출품은 쌀이 약 60%를 차지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옥양목을 통한 중계무역으로 폭리를 취하고 그 이익금으로 쌀과 콩을 대량 구입하여 자기 나라로 반출했다.
병자년 흉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많은 곡류가 반출되다 보니 곡물 가격은 뛰고 품귀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방곡령은 이런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서 나온 지방관의 고민이었다.
여기에 외국산 면제품 유입으로 삼베, 모시와 같은 가내공업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어 더욱 민심이 나빠졌다.
선착장에는 일본 상인의 중계무역 상품인 면제품과 일본으로 싣고 나갈 쌀가마 등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이대로 두면 조선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878년 7월 19일 이 지역을 관할하는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만직(李萬稙)은 이러한 정황을 별단 보고를 통해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받지 않는 폐단'에 대해 조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조정에서 검토한 후 고종의 윤허를 받아(1878.9.6.) 당시 동래부사 앞으로 내려온 지시 내용은 '세목책자(稅目冊子)와 함께 수입품에 대한 수세(收稅)조치'였다.
관세는 수입자나 화주가 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무관세를 인정했기 때문에 수입자인 일본 상인에게 관세를 물릴 수가 없었다.
부득이 1978년 9월 28일에 두모진에 있는 변찰소(辨察所) 내에서 일본 상인으로부터 구매하는 조선(동래) 상인에게 수세라는 명목으로 과세하였다.
당시 동래부 지역에 ‘海關'이라는 명칭의 기구가 창설되어 있었음에도 관세무역통상 전문가인 판찰관의 관저(둔관)에서 수세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선박이 왕래할 때 수색을 하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海關'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해관 건물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나 항구를 출입하는 선박에 대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아니하였다.
또한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수년간 면세를 하기로 한 단서 조항 때문에 예전과 같이 조·일간 의 무역을 규제하고 세금을 거둘 수는 없었다.
새로 설치한 해관을 놓아두고 굳이 판찰관의 처소로 이용되고 있던 두모진 관저(둔관)에서 수세를 실시한 조선 정부의 주도면밀함과 신중함을 느끼게 된다.
조선 정부는, "일본 관리관(管理官)이 온 것은 전적으로 통상 문제를 위해서인데 해당 부사(府使)가 면접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앞으로의 번거로운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따로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을 뽑아 맡아 처리하도록 한 연후에야 피차간에 규정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해 두모진을 혁파하고, ’지금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생소한 사람의 손에 맡기기 어려우니‘, 관세무역통상 전문성을 가진 역관을 배치하면서 부산 훈도(釜山訓導)를 판찰관(辦察官)으로 개명하고, 병조(兵曹)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다.
즉 조·일 정부 간 마찰을 예견하고 미리 이에 대비하기 위한 전문성 있는 인재(테크노크라트) 배치, 관직 명칭 변경, 소속기관 변경 등 나름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다.
‘변찰소‘는 당시 '경찰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훈도는 조선시대 한양의 4학(學)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관인데 부산 훈도는 일본어에 능통한 역관들이 임명된 듯하다.
조선 정부가 두모진에서 수세하기로 한 결정은 개항 이전까지 유지되고 있던 동래부의 상인에 대한 관리 관행, 의주부 상인 및 관리의 수세에 대한 형평성 문제제기, 그리고 동래부의 재정 운영상 재원확보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가운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정부가 두모진에서의 수세를 집행하면서 무역 거래 물품의 가격은 순식간에 급등하였다. 10월 6일 부산에 주재한 일본 관리들이 동래부를 찾아와 수세가 조약에 위반되었다며 항의하는 한편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는데, 동래 부사는 수세는 조선 상인에게 부과하는 것이므로 일본 측이 관여할 바가 못 된다고 일축하였다.
일리 있는 논박이다. 현재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지극히 문제가 없는 것으로 조선 정부는 관세가 아닌 내국세를 부과한 것이므로 이중과세라는 등의 일본 측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10월 9일 일본 상인 20여명은 판찰관 관저로 몰려가 새로운 세금의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다음날인 10일에는 일본 상인 200여 명이 동래부로 난입하여 수세를 간접적인 관세로 보고 과세 정지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이에 격분한 동래 부민들은 기와 조각과 자갈 등을 투척하며 일본 상인들에게 대항하였다. 일본 상인들의 반발이 심했음에도 동래부사가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일본 측은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12.4).
즉, 일본군 수병 150명이 상륙하여 두모진 근처를 행군하였으며, 두모진 뒷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하면서 공포를 여러 발 쏘기도 했다.
또한 함선에서는 영도를 표적 삼아 대포의 발사를 시험하였다. 그럼에도 조선 정부는 계속해서 조선상인들을 대상으로 수세를 실시하였다.
허나, 결국 조선 조정은 부득이 세금 부과를 정지하였고(12.9), 동래부는 수세를 정지하였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에 구두로 통보하였다(12.24).
조선 국민들의 조선 정부 지지, 조선 조정의 논리, 협상력 등에서 일본보다 부족함이 없었으나,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수병 150명, 군함, 함포 등이 없었다.
이 두모진 수세 사건은 조선이 근대적 관세 제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훗날 1883년 조일통상장정을 통해 관세 조항을 새롭게 체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부산(1876) / 원산(1880) / 인천(1883) 3항 개항을 결정하였고, 청나라와 같이 세관제도 전문가(테크노크라트)인 외국인을 총 세무사 및 세무사로 채용하여, 근대적 세관제도를 도입, 운영하게 되었다.
이홍장(李鴻章)의 자문을 받아 임명한 총 세무사 독일인 묄렌도르프(P.G.V.Möllendorf; 穆麟德, 1848~1901)의 주도하에 1883년 인천해관(6.16)을 시작으로 원산해관(6.17), 부산해관(7.3)을 창설하고 해관 관련 업무를 시작했다.

[프로필 ] 이대복 (사)한국 FTA 원산지연구회 이사장
• 경영학 박사
• 2022.10.28 ∼ 한국세관역사연구회 회장
• 2007.3.14.∼2007.9.30. 관세청 세관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저서 : ‘한국세관의 역사(2009년, 동녘)’
• 세계관세기구(WCO), 동국대, 외국어대 등에서 자금세탁방지론 강의
• 2005년 홍조근정훈장 수상
• 1994년 WCO 사무총장상 수상
• 2010.06~2011.07 관세청 차장
• 2008.09~2010.05 인천공항 본부세관장
• 2003.~2008. 관세청 감사관, 조사국장, 통관관리국장
• 2006.~2007. 미국 관세청(CBP) 파견근무
• 2002.~2003. 미국 관세/무역전문로펌(Sandler, Travis &Rosenberg, P.A.) 고문
• 1998.~1999. 천안세관장
• 1989.~1991. 관세청 평가협력국 관세협력과 미국·통상 담당사무관
• 1988.~1989. 구미세관 수출(환급)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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